[김국헌의 직필] ‘이밥에 고깃국’도 해내지 못한 김일성

20년 전 1994년 7월 8일 북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이튿날인 7월9일 낮 12시에 ‘특별방송’이 있겠다는 조선중앙통신을 청취한 안기부에서는 뭔가 특이한 것이 있다는 보고를 지휘부에 했다. 북한에서는 지금까지 중대방송이라고 하였지 특별방송이란 용어는 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2시 정각, 그야말로 특별한 경천동지할 뉴스가 발표되었다.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것이다. 남한에서도 민주인사. 그중에서도 문익환 목사 등은 기색(氣絶)하리만큼 놀랬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김일성 조문을 가야 되는 것 아니냐는 논의도 잠시 일어났다. 이는 1945년 4월 루즈벨트가 사망하였을 때 나치 독일에서 조문을 보내야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김성주(金聖柱) 일명 김일성은 1912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김형직이고 어머니는 강반석(姜盤石)이다. 반석은 기독교를 종교로서 정립한 베드로를 일컫는다. 평양은 일찍부터 기독교가 성한 곳이었다. 이처럼 김성주는 비교적 풍요롭고 온전한 부르조아 가정에서 자랐다.

김성주는 1930년대 이후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의 한 지대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김성주는 이 무렵 구한말의 전설적 영웅인 일본 육사 출신의 김일성 장군을 좇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 1937년의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41년 김일성 부대는 관동군의 토벌에 의해 소련으로 들어와 극동군 정찰국의 일부가 된다. 소련군정은 1945년 10월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해 조선 민중의 지도자로 내세운다. 군정기간에 김일성은 조선의 지도자로 완벽히 각색되고 토지개혁 등 모든 프로그램은 소련군정에 의해 지시되고 추진된다. 1948년 9월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한다. 당, 정, 군의 조직과 운용에서 김일성은 조선의용군과 소련 2세들의 지원을 받아 북한을 당시 남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한 강력한 적화기지로 변모시킨다.

6.25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졸라서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큰 그림에서 보면 김일성은 스탈린이라는 부처님의 손 안에서 노는 손오공에 불과했다. 즉, 6.25 남침은 철저히 소련에 의해 조직되고 집행된 것이었다. 1949년 6월 미군이 떠나고 1950년 2월 ‘에치슨 라인’ 선언으로 공식적으로 무주공산이 된 남한을 적화하는 것은 스탈린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남침작전 계획도 모두 소련군 고문관에 의해 작성되었다. 그러나 7월 초 트루만의 결단에 의해 미군 참전이 결정되자 2차대전을 통하여 미국과 미군의 막강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스탈린은 꽁무니 빼기에 바빴다. 이후 전쟁은 주로 최고사령관 김일성, 전선사령관 김책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고 맥아더가 전선을 책임 맡은 이상 북한군의 8월 공세, 9월 공세는 무모한 것이었다.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지 못한 것은 북한군으로서는 달리 손을 써볼 수 없는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때문이었다. 중공군이 개입한 이래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손을 떠났다. 중공군이 미군을 상대하고 있는 동안에 김일성은 제2전선을 설정하여 한 역할을 하였다.

정전 이후 김일성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북한을 정력적으로 재건하였다. 북한 인민들만의 힘으로 된 것은 물론 아니다. 여기에는 동독 등 동유럽 여러 나라가 실질적으로 도와준 공이 컸다. 대부분의 북한 인민은 이같은 전후 건설을 자기와 동일시하며 자랑스러워한다. 이는 마치 남한 국민이 박정희와 더불어 이룩한 근대화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과 같다.

북한 간첩이 전향하면서 가장 큰 갈등을 느끼는 것이 “이제부터 김일성을 버리는구나”라는 갈등이라고 한다. 전향의 진정성 여부는 “김일성에 대해 침을 뱉는가” 이다.

김일성은 제2전선의 경험을 1960년대 초 4대군사노선-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군의 현대화-을 바탕으로 전후방 동시타격을 노리는 배합전으로 체계화하였다. 오늘날 비대칭전략은 이를 이어받은 것이다.

김일성은 후계자 문제에 한편 성공하고 한편으로는 실패하였다. 김정일은 최현 김일 오진우 등 원로그룹의 지원에 힘입어 김영주를 제치고 후계자로 선정된다. 우리말에 “장조카 이기는 삼촌 없다”고 하지만 김정일의 승계는 상당한 성과로 김일성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라는 증언이 황장엽 등 여러 군데서 나오고 있다.

80년대는 김일성-김정일 공동통치 시대였다고 하면, 90년대는 김정일-김일성 공동통치시대라고 한다. 김일성이 김정일의 치적이 무언가 잘못된 점이 있지 않는가고 의문을 품고 자기가 직접 챙겨 보아야겠다고 하는 즈음에 돌연 중풍을 일으켰다. 김정일이 김일성을 죽였다고 하는 한동안의 루머는 위기의 순간, 골든타임에 김정일이 수령을 살리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정치인으로서 김일성은 같은 국내파 공산주의자에 비해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서민과 친하려 노력했고 이점에서 경기중학교 출신의 인텔리, 정통 공산주의자 박헌영과는 차이가 많았다. 김정은이 할아버지를 흉내 내는 것은 이를 연출하는 것이다. 반면에 김일성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그는 유치한 주체사상(主體思想)도 쉽게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1960년대 중소분쟁을 이용한 절묘한 등거리 외교를 전개하면서 제3세계와 거리를 좁혔다. 김정일이 전두환을 폭살하려 하였을 때 “북한이 그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 비동맹국에 들인 공력이 얼마인데 이를 무(無)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를 쉽게 승인하지 않은 것은 국제정치를 읽는 전략가로서 김일성이 녹록치 않은 인물임을 보여준다.

1972년 남북공동합의서는 김일성이 6.25와 같은 단색(單色) 무력남침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남한의 허점을 찾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는 간접 접근전략으로 전환하였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오늘날 보수층이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못마땅하여도 용인하는 것은 이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일성의 공세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통일 후 한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리 크지 못할 것이다. 김일성이 ‘모든 인민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소박한 꿈도 실현하지 못한 것은 후계자 문제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60년대 무(無)에서 유(有)를 일으킨 점에서 박정희와 닮았다. 그러나 김종휘 수석이 김일성의 인상을 살모사에 비유하였듯 그는 너무도 많은 피를 손에 묻혔다.

수많은 인민을 죽이고 고통을 안겨준 점에서 김일성은 실패한 전략가, 정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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