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 전두환에게 배울 것은?
이승만은 3.1운동 후 설립된 한성(서울), 상하이, 블라디보스톡 세곳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다같이 대통령,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그만큼 구한말 독립협회 이래 민족지도자로서 그의 명성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태생부터 양녕대군의 후손임을 내세우는 전형적 양반이었다. 이승만은 하버드대와 콜럼비아대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에서 훗날 대통령이 된 윌슨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은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아이젠하워(아이크)는 유럽원정군 사령관으로 독일의 항복을 이끌어냈고 그 덕에 미국 대통령도 되었지만, 군인으로서는 맥아더와 같은 비범한 군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맥아더보다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는 1, 2차 대전 어간에 중령을 17년을 달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전역을 지휘하며 4년만에 원수가 되었다. 전장(戰將)으로서 아이크는 패튼만큼 화려한 전공을 세운 것이 아니나 여러 나라, 수백만의 병력이 참가하는 대전역(大戰役)을 지휘하는 것은 단순히 군사작전이 아니었다. 이점에서 그는 대장군(大將軍, overload)이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 패튼, 롬멜, 쥬코프 같은 ‘빛나는‘ 장군은 아니었으나, 미국이 요구하는 ‘훌륭한’ 장군이었다.
아무 것도 없는 나라의 대통령 이승만이 감히 한국을 지켜주고 먹여 살리는 세계 유일 최강의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호통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문민우위의 조선의 양반체질이 몸에 배어 있는데다가 윌슨 대통령에게 사사(師事)하였듯, 아이젠하워보다 한 시대 이전 미국 최고의 인물들과 교유한 사람이라는 자긍심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던 때문이다.
박정희는 준재들이 모인 사범학교에서 배웠고 정예 일본군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세계 최강의 미군을 경험하고 미국 유학도 하였다.
반면 김일성은 만주에서 유격대 생활로 단련되었으며 중공군과 소련군의 단면을 보았다. 근대화를 하면서도 박정희는 세계의 중심인 미국의 틀 아래 시장경제에서 길을 찾았다고 하면 김일성은 2차대전을 거쳐 열강의 반열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사회는 형편없이 후진적인 소련에서 원형을 찾았다. 북한의 농업화는 집단농장, 국영농장의 再版이었으며 공업화는 콤비나트 중심의 공업화와 같았다. 1950, 60년대 산업화의 초기단계에는 이러한 노동집약적 개발전략이 주효하였으나, 소련과 동구권의 침체가 증명하듯 1970, 80년대에는 이런 방식으로는 경쟁력과 효율성이 떨어졌다.
군사전략도 김일성은 유격대 기질을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군이 필요한 것은 미군이 모두 가져다 주었다. 북한이 기댈 곳은 중국과 소련 밖에 없었으나 그들 역시 모든 것이 궁핍했다. 때문에 북한은 모든 것을 자신이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전 인민의 무장화, 전 국토의 요새화가 그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의 경제는 군수공업 중심으로 돌아갔다. 1930년대 일본의 만주진출을 위해 북한엔 공업화 기반이 닦여 있었다. 이를 기초로 북한은 이미 1948년에 자동소총을 생산하였다. 북한경제는 이 기반 위에서 철저히 군수공업 위주로 돌아갔다. 북한은 자본주의와 같이 전쟁경제가 국민경제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김일성은 주민생활을 희생시키며 제한된 자원을 전쟁경제를 위해 쏟아 넣었다.
전쟁준비에 모든 것을 쏟아 넣은 김일성 시절에도 인민들은 세끼 밥을 거르지는 않았다. 김일성이 비교적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것은 ‘이밥에 고깃국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세끼 밥은 굶지 않는’ 호구(糊口)가 가능토록 하였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파탄난 것은 김정일 때문이었다. 김일성이 쓰러진 것도 이를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피바다’ 등 예술을 이용한 선전선동에 재주가 뛰어났다. 빈약한 북한 군사력을 가공(可恐)한 것으로 비치기 위한 연출에도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다. 세계청소년축제를 치르기 위해 쏟아 부은 돈도 막중하였다. 김정일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투입한 돈은 북한경제에 치명적이었다. 90년대 고난의 행군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처럼 얼마 안 되는 기간에 김정일은 북한을 철저히 파탄으로 몰고 갔다.
김일성이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의 점지를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경기중학교 출신의 수재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 멤버로서 해방 후 자연스럽게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로 떠오른, 한마디로 김일성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 자신 정통 이론가 트로츠키를 물리치고 권력에 오른 스탈린은 공산주의 교조(敎條)에 박힌 박헌영보다 발랄한 김일성이 괴뢰(傀儡)로 부려먹기에는 훨씬 호감이 갔을 것이다.
김일성은 박정희와 비교될 것이 아니라 전두환과 비교된다. 전두환은 운동신경이 빨라서 권력 흐름에 따라 변신이 능숙하였다. 박정희 소장의 부관이었던 동기생 손영길을 떠밀어 일찍부터 박정희와 연결되고, 5.16의 성패가 달려있던 절체절명의 시기에 육사생도를 동원하여 혁명지지를 이끌어내겠다고 제안하는 등, 위기를 극복하는 감각이 뛰어났다. 12.12도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결단이었다. 지미 카터의 인권외교로 만신창이가 된 미국을 일으키라는 미국민의 성원으로 대통령이 된 레이건과 일찍부터 거래를 터서 일찍부터 미국을 방문하여 정권을 안정시킨 전두환의 외교감각은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했다.
이승만, 박정희, 김일성은 모두 후계자 문제에 실패했다. 이승만이 이기붕과 같은 용렬한 인물로 후계를 삼으려 하였던 것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이승만은 단순히 자유당의 영수가 아니라 국부(國父)였다. 신익희, 조병옥 등은 충분히 그를 이을 수 있는 무게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이승만보다 앞서 세상을 떴다. 이것이 4.19 민주혁명을 있게 하려는 이성(理性)의 간지(奸智)였는가? 그것은 다시 5.16을 일으켜서 조국근대화를 점화했다.
박정희가 3선개헌을 했더라도 유신만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루즈벨트는 4선을 하면서 미국을 위기에서 건져냈다.
전두환은 우연히 박정희의 뒤를 이었으나, 장기집권의 유혹에서 벗어나 국민에 대한 단임약속을 지켰다. 더구나 6.29가 확실히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전두환의 정치감각은 탁월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노태우는 그나마 차선은 되었다. 북방정책으로 외교의 새 지평을 열고 민간정부로 이어지는 진정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고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김일성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겠지만 김정일을 택한 것은 잘못이었다. 이보다는 황장엽 등을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하여 보다 많은 인재로 이루어지는 집단지도체제를 만들었어야 했다. 더구나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정일의 후계는 그냥 만화(漫畵)일 뿐이다.
지도자는 우선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을 잘 공부해야 한다. 혁명, 정변, 암살… 정치의 모든 국면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