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박근혜-시진핑 정상회담 승자는

박근혜, 스타일외교에 머물러 역사문제 언급도 못해
시진핑, 美전통우방 한국서 美日에 동시견제구 성공

노태우 대통령이 한소, 한중 수교와 남북기본합의서를 이룬 북방정책의 성공은 이승만 대통령이 1950년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낸 만큼의 획기적 의의를 지닌다. 뒤의 민간인 대통령들은 이를 인정하기 싫어 물태우니 뭐니 비아냥거렸지만 북방외교와 88서울올림픽 성공은 박정희 이래 우리가 이룩한 모든 성취를 종합한 역사적 쾌거였다. 북방정책의 성공에는 김종휘 안보수석이 있었다.

안보수석의 유형에는 군 출신, 외교관 출신, 학자 출신이 있다. 김종휘는 학자이면서도 국방대 교수를 오래하여 군도 잘 알았다. 김대중 시대의 임동원은 군인에서 출발하여 정보, 외교, 통일 분야에서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었고 DJ의 압도적 신임을 바탕으로 외교, 안보, 통일 정책을 완벽하게 구상, 조정, 추진하였다.

안보보좌관으로 가장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다. 그는 ‘불확실한 나팔’(uncertain trumpet)에서 핵무기 중심의 대량보복전략에서, 핵전력과 재래식 전력, 거기에 대비정규전까지 포함한 맞춤형 전략-신축대응전략을 창시한 전략가였다. 안보보좌관으로서 키신저가 주도한 미중수교는 오늘날 중국이 이야기하는 신형대국관계를 연 것이었다. 그러나 월남평화협상에서 월남을 넘겨주는 악역을 맡았고 그 공(?)으로 월맹의 레둑토와 같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즉 경략가로서 그에 대해서는 논의가 엇갈린다. 그러나 그가 국가전략을 대통령 차원에서 종합, 조정하는 안보보좌관 역할을 가장 잘 수행했다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다.

김관진 안보실장이 김종휘나 임동원 수석 같은, 대통령의 alter ego로서의 안보실장이 되기를 바라지만, 경험의 제약과 박대통령의 외교 안보진영 운영 패턴으로 보아 어려울 것 같다. 이번 한중정상회담에서도 안보실장의 역할은 상당히 제한되었던 모양이다.

시진핑은 서울대 특강에서 “역사상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중한 양국은 항상 서로를 도왔다”며 “임진왜란에서 조선과 명이 같이 싸웠고 20세기 일본 군국주의가 중한 양국에 야만적 침략을 해 양국이 모두 큰 고난을 겪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태어나 문화혁명시대에 어려움을 겪은 시진핑의 역사인식은 대부분 중국 지도자와 지성인들과 같이 매우 험애(狹隘)한 것 같다. 그는 1882년 임모군란 때 원세개가 청군 진영에 인사차 온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하였던 사실 등은 모르는 모양이다. 이는 1895년 을미사변에서 일본군이 민비를 난자하고 불태운 것과 같은 천인공로할 짓인데 말이다.

시진핑은 또한 1950년 10월 중공군 개입으로 통일이 좌절된 것을 한국 국민은 한시도 잊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한중관계는 협력의 역사보다 갈등의 역사가 훨씬 많다. 오늘날에도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라고 남의 조상 묘를 파내가려는 중국이다. 따라서 한중은 결코 편하게 오갈 수 있는 이웃집이 아니다. 다만 이를 목표로 양국이 함께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희망까지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한국 땅에서 일본을 때리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은 “한국과 중국이 쓸데없이 과거문제를 끄집어냈다”고 빈축(嚬蹙)대면서 미국을 자극하고 있다.

한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단기적으로는 승리를 거두었다. 아마 7대3 정도로 시진핑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나 싶다. 박대통령은 외교는 스타일이나 덕담이 아니며, 가열(苛烈)한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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