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시진핑=모택동+주은래+등소평?
모택동은 불이고, 주은래는 물이고, 등소평은 길이다. 모택동은 왕조를 일으켰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민심을 잡아 왕조를 창건했다는 데서 한의 유방(劉邦)에 흡사하다. 모택동은 공산혁명을 ‘불씨 하나가 광야를 불태울 수 있다’고 비유하였다. 공산당은 불씨였다. 모택동은 이 불씨로 천하를 손에 넣었다. 중국 천하를 광란으로 몰아넣은 문화혁명도 광야를 불태운 불이었다. 불을 끈 것은 주은래였다. 주은래에 대해서는 키신저가 평한 것이 백미다. “나는 60여년 공직생활을 통하여 주은래 만큼 강한 인상을 준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주은래가 내민 손-의례적인 악수-을 차갑게 거절하였다. 그런데도 주은래는 당황하지 않고 잔잔한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
등소평은 중국이 갈 길을 제시하였다. 1978년 이래 등소평이 주도한 개혁개방으로 중국이 오늘날만큼 일어서지 않았더라면 등소평은 말할 것도 없고 모택동, 주은래도 체 게바라처럼 제3세계의 혁명가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등소평은 항일투쟁 영화를 시사(試寫)하는 자리에서 “왜 모 위원(毛 委員) 만세만 있고 주 사령(朱 司令) 만세는 없는가?”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다”라고 덧붙였다. 홍군의 사령은 주덕(朱 德)이었고 정치위원은 모택동이었던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이 자리는 모택동도 참석한 자리였는데 등소평은 모택동이 있는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강기(剛氣)였다.
어느 중국 전문가는 등소평을 이렇게 평했다. “This man(Deng Shiao-ping) will probably occupy a more esteemed place in Chinese history than Park Chung Hee in South Korea.”
재미있는 것은 등소평이 기준이 아니라 박정희를 기준으로 하여 등소평의 무게를 단 것이다. 마치 “내 뒤에 오는 놈을 보니 바람과 같이 빠르더라”와 같은 비유다.
시진핑은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호금도에 이은 5세대 영도이다. 혹자는 “시진핑은 이들을 다 모아놓은 인물과 같다”고 보면서 불, 물, 길에 이은 ‘빛’이라고 자리를 매기고 있다. 그럴듯한 평가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시진핑이 당면한(또는 앞으로 당면할) 문제는 이들 영도(領導)가 다 달려들어도 버거울 것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즉 중국에게 G-2는 아직 먼 것이다.
이번 방한기간 중 보여준 그의 풍모는 녹록치 않았다. 장차 한국을 이끌어갈 서울대 학생들을 통해서 한국 국민에 바로 다가서는 정상회담 전략은 정교하면서도 담대하다. 역시 13억 가운데서 고른 인재이니 만만치 않은 것이다. 중국공산당 7인의 정치국 상무위원은 인품이나 능력, 정치력과 영향력에 있어 모두 시진핑에 버금가며, 시진핑의 말을 받아쓰기만 하지 않는다. 중국에는 7명의 주석이 있다고 하는데, 중국의 두터운 지도자 군(群)이 부럽다.
문제는, 한국, 일본, 미국, 북한 등 주변국 지도자들이다. 특히 우리 지도자와의 대비다. 더욱이 펑리위안의 옷차림에만 신경을 쓰도록 독자를 이끌어가는 언론 지도층도 큰 문제다.
시진핑은 자석 같이, 소리 없이 한국을 끌어당기고 있다. 정신 똑 바로 차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