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7)반공포로 석방
포로송환문제를 둘러싸고 교착상태에 있던 휴전회담이 재개되자 한국정부의 휴전반대운동은 절정에 달하였다. 1953년 4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장병들에게 “국토의 통일이 없는 휴전보다는 차라리 압록강으로의 진격을 택해야 할 것이다”라고 연설하였다. 이승만은 4월 24일 미 국무성에 보낸 메시지에서 “만일 미국이 압록강 남쪽에 중공군을 주둔케 하는 어떠한 협정이라도 체결할 경우 본인은 한국군을 유엔군으로 부터 철수시킬 것이며, 필요하다면 한국군은 단독으로라도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라고 경고하였다.
이에 놀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및 한국군 증강을 약속하여 한국 정부를 무마하려 하였으나 이견은 좁혀지지 않았다.
6월 6일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외국군의 철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실시되어야 하며,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한국군은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결의를 재표명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친서를 통하여 휴전 후의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를 약속하였으나, 6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장병들에 대한 연설에서 거듭 휴전을 비난하고 단독으로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1953년 6월 18일 자정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2만693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면도를 하고 있던 처칠이 놀라 턱을 면도칼로 베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세계는 진동(震動)하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경악하여 국무차관보 로버트슨을 서울로 급파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국군 20개 사단 증강과 2억달러의 경제원조를 약속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로써 대한민국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된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한, 실로 유례없는 외교적 일격(coup)이었다. 노년에 독재에 흐르고 자유당의 부패를 바로 잡지 못한 과(過)는 유감이지만,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며, 안보의 기반을 다진 이승만의 공(功)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다.
국제정치와 외교의 달인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구두약속이나 친서로써 충분치 않다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미 의회의 동의를 얻은 법적인 보장을 요구하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1월 조인되고 1954년 미국 의회의 비준동의를 얻었다. 이로써 한국과 미국은 동맹이 되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949년 성립되었고, ANZUS동맹은 1952년 결성되었다. 미국이 非 백인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은 한미동맹이 처음이었다. 미일안보조약은 1961년에야 성립되었다. 한국은 미국과 ‘더불어’(together) 싸운 나라이고 일본은 한때 미국에 ‘대하여’(against) 싸운 나라이다. 외교관은 이 의의를 지킴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북한에서는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날을 전승절(戰勝節)이라고 하지만 전혀 당치 않다. 김일성은 625 남침 실패로 상당한 땅을 상실하였다. 국군은 서부전선에서 약간 물러났을 뿐 중동부에서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였다. 625 전에는 38선이 전곡의 초성리, 포천의 만세교, 동부에서는 가칠봉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설악산과 속초는 38선 이북이었다. 휴전협정으로 군사분계선은 훨씬 위로 올라가서 그어졌다.
아는가? 장병들의 피로 우리는 설악산을 얻고 금강산을 지척(咫尺)에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