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송요찬의 탄식, ‘한빛부대 하필 日자위대한테 탄약 빌리다니···’
12월 호국인물로 송요찬 장군이 선정되었다. 송요찬 장군은 4·19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계엄사령관이었다. 데모대가 경무대로 육박하는 가운데 급박해진 경찰이 실탄 지급을 요구해왔다. 당시 군은 M-1 소총을 주로 사용했는데 비해 경찰은 칼빈 소총을 사용하였다.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경찰에 M-1 소총 탄약을 지급도록 하였다. 물론 경찰은 이 탄약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이로써 경찰 발포로 인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다. 4·19의거가 혁명으로 성공하는 데는 이처럼 송요찬 계엄사령관의 적시적이고 엄정한 계엄군 운용이 절대적으로 기여하였다. 4월혁명이 학생혁명이라 하나 정확히는 국민혁명이다. 이때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절대적이었고 국민의 군대로서 국군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다.
일찍부터 군에서 ‘타이거 송’으로 알려진 송요찬 장군의 에피소드는 많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1952년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전선의 송요찬 부대를 방문하였을 때다. 송요찬 장군의 보고는 딱 세마디,
“Enemy is there. We are here. We are ready to attack.”
상세한 브리핑을 기대했던 아이젠하워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잠시 후 아이젠하워는 “내가 받은 브리핑 가운데 가장 훌륭한 브리핑”이라고 격찬하였다. 과연 그 송요찬에 그 아이젠하워다. 장군이란 이런 것이고, 그래야 된다.
1918년생인 송요찬 장군은 당시 34세였다. 송요찬은 집안이 가난하여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일본군 하사관 출신이다. 평양사범학교 출신인 백선엽이나 동양대학 출신인 장도영과는 같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라 하더라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송요찬의 이 재치와 기개는 어느 명문출신 장군에 못지 않는다. 이 청년장군들이 6·25를 통해 조국을 지켜낸 것이다. 5·16은 이 기개가 도탄에 빠진 조국의 현실에서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배움에는 ‘생이지지, 학이지지, 습이지지’(生而知之, 學而知之, 習以知之)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듯 사람의 그릇, 질량은 각각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오늘날 육군대장들로 이루어진 안보진영의 정무적 판단에 우려의 소리가 적지 않다. 나이나, 학력이나, 경력으로나 현 안보진영은 6·25 당시의 청년장군들에 비해 월등하다. 그러나 굳이 비교를 하자면 선배 청년장군들은 生而知之의 차원이요, 현재의 군인들은 學而知之, 또는 習而知之의 차원이라고 비유하는 것이 어떨까!
남수단에 파견된 한빛부대가 탄약 1만발을 하필이면 일본 자위대에 꾸었다는 맹랑한 소리를 들으면서 하도 기가 차서 나오는 차탄(嗟歎)이다. 현지의 대령이 잘못이 아니요 국방부의 판단이 문제라는 얘기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대령, 즉 colonel이면 얼마나 무거운 자리인 것을 아는가? 대령 때 그런 일을 제대로 못하는 위인은 대장이 되어서도 마찬가지다. 중량은 중력가속도에 따라 변하지만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리학의 기본이다.
그 사람의 질량이 얼마나 되느냐를 판별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과 책임, 바로 사람을 보고 고르는 것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