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4)클라크 장군의 확전구상
전선의 교착이 계속되자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대장은 대규모 작전으로 전선을 돌파하려 하였다. 그는 1952년 10월 초 콜린스 육군참모총장에게 “유엔군이 휴전회담을 조속히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공산군에 대한 군사적 압력이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공산측이 유엔군의 휴전조건을 수락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대규모작전이 필요하다”면서 20일간에 걸친 3단계 작전으로 평양~원산을 목표로 한 지상군의 포위공격, 수륙양면 기습 및 공수작전, 그리고 상황에 따라서는 중공 본토 안 군사목표에 대한 유엔군 해·공군의 작전까지 망라된 확전구상을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보병, 공수, 해병 각각 1개 사단, 한국군 2개 사단, 자유중국군 2개 사단과 야포 12개 대대 및 대공포 20개 대대 증편을 요구하였다.
1952년 11월 5일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2월 2~5일 아이젠하워는 그의 선거공약대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클라크 장군은 아이젠하워도 군사적 승리를 추구할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확전건의가 승인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한국을 떠나기 앞서 아이젠하워는 모든 주요 지휘관들과 회동하였으나, 클라크 대장의 확전건의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클라크 장군은 크게 실망하였다. 그는 여러 대화를 통해 아이젠하워도 전임 트루먼과 같이 조속한 휴전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독전쟁에서 클라크는 6집단군 사령관으로 유럽원정군사령관 아이젠하워의 바로 수하에서 활약하였다. 12집단군은 브래들리, 21집단군은 영국의 몽고메리가 지휘하였다.
1953년 2월 11일 8군사령관이 경질되어 ‘한국군의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이 이한하고 육본 작전참모부장 테일러 중장이 취임하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전쟁지도를 실현하기에 적합한 8군사령관이 채택된 것이다. 이후 테일러는 줄곧 작전상 꼭 필요한 요충지를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가급적 출혈을 줄이는 작전을 택하게 된다.
테일러는 <UNCERTAIN TRUMPET>의 저자로 아이젠하워 시절 핵무기에 의한 대략보복전략(Mass Retaliation Strategy) 대신 핵전력과 재래식 전력, 대비정규전의 조합을 강조한 신축대응전략(Flexible Response Strategy)의 설계자이다. 또 케네디의 합참의장으로서 미국이 월남전에 발을 들여 놓게 만든 장본인 중의 하나이다. 백선엽 장군은 테일러를 리지웨이나 밴 플리트 같은 맹장이기보다는 민첩한 군정가로 기억하고 있다.?
선거에서 당선된 대통령이 조기종전을 원하고 있는 국민의 여망을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나 밴 플리트 8군사령관이 불과 몇 년 전 전선에서 생사를 같이 하던 전우였던 아이젠하워에 기대를 건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아이젠하워가 전혀 ‘새로운 전쟁’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중공군의 전법을 경시하다가 일패도지(一敗塗地) 하였듯 아이젠하워도 전쟁과 협상을 교묘히 조합하는 공산측을 다루는 데 있어 아마추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