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6)금성전투···”유리한 휴전조건 위해 더 많은 피가 요구됐다”

1953년 봄 중공군은 전체 전선에서 전초고지들을 목표로 1개 대대나 1개 연대 규모로 국부적 제한공세를 가해왔다. 국군은 이들 고지들을 사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테일러 8군사령관은 이들 고지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는지 냉정히 판단하면서 고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밴 플리트가 기회만 주어지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던 데 비해, 테일러는 인명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테일러는 2차대전시 공정사단장으로서 마켓가든(Market Garden) 작전에 참전하여 레마겐의 철교를 탈취한 용장이었으나, 한국전쟁에서는 일을 벌이기보다 수습하는 쪽으로 작전을 지휘하였다.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지 1개월 후에 중공은 전쟁종결에 대한 새로운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4월 26일 휴전회담이 재개되었다.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군사분계선의 획정이었다. 양측은 휴전이 성립되면 현재 현재의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이므로 장차를 위해 유리한 지역을 확보해두려고 한국전쟁 마지막 공방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중부에서는 철원-평강-금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가 대표적이었다. 그중에도 오성산은 김일성이 “장교 군번 한 트럭 하고도 바꾸지 않는다”는 요충이었다. 동부에서 월비산은? 강릉까지도 감제하는 요지였으므로 김일성도 이를 확보하려 필사적이었다. 서부의 베티고지 전투에서는 김만술 소위가 1개 소대로 중공군 1개 연대의 공격을 격퇴하여 금성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유엔 참전 16개국 군의 의장행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6월로 접어들면서 한국민의 휴전반대 기세를 꺾으려는 중공군은 60, 67, 68의 3개 군으로 금성 지구의 한국군 2군단에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였다. 이 공세는 1951년 중공군의 춘계공세 이후 가장 대규모의 공세이었다. 목표는 금성 돌출부의 제거이었다. 이 돌출부를 빼앗기면 동서로 이어지는 방어선과 병참선이 차단되고 북한군의 방어부담은 증가되며, 북한의 공격출발 거점이 되는 평강이 위협 받기 때문이다. 6월 10일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선은 크게 흔들렸고 6월 18일에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9일간에 걸쳐 중공군은 13km에 달하는 정면에서 3km를 진출하였다. 국군은 730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며, 중공군도 6600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산되었다.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2만7000여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모택동은 “정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한국군 1만 명을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중공군 20병단은 15개 사단으로 금성천 북방에서 한국군 4개 사단을 양익포위 하였다. 한국군 방어선이 분단되고 대혼란이 야기되자 8군사령관은 한국군에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를 명하였다. 7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2만8000명의 사상자를 내었으나 중부전선에서 유리한 방어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8군은 1만4000명의 사상자를 내었는데 대부분이 국군 장병들이었다. 중공은 이승만의 단독 북진론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한 한국군 전투력에 치명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정전 이후 외국군이 철수하였을 경우 북한군이 한국군에 비하여 우세를 유지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휴전회담 기간 피아간 장병들은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의 휴전을 위해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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