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1) 합참역할이 전쟁 승패 ‘좌우’

1951년 6월 말 미 8군은 총 55만명의 병력으로 46만명으로 추산되는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7월 초 밴 플리트 장군은 일련의 제한공격을 결심하였다. 10월 초까지 8군은 전 전선에서 유리한 중요지형을 확보함으로써 38선 북쪽에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11월에 접어들자 전 전선에서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공군의 반격이 저지되자 전선은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때 8군에 새로운 작전지시가 하달되었다. 11월 12일 유엔군사령관은 8군사령관에게 공세작전을 일절 중지하고 현 진지에서 공세적 방어를 실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로써 8군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의 승인 없이는 1개 대대 규모 이상의 공세작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제한조치는 조기종전을 위한 미국 정부의 초조한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11월 27일, 유엔사는 30일 동안의 임시 휴전기간을 갖자는 공산측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런데 공산측은 30일 동안의 휴전기간을 이용하여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때부터 20여 개월 전선은 전반적으로 교착상태가 되고 피아간의 지상전투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되었다. 단장(斷腸)의 능선, 피의 능선, 저격능선, 백마고지, 크리스마스 고지, 불모(不毛)고지 전투 등에서 엄청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만일 미국이 1951년 말 공산측에 휴전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끝까지 ‘힘’을 사용했던들 이와 같은 교착상태와 소모전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전의 조기종전이라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 리지웨이나 밴 플리트가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위한 방법론에서 판단과 입장이 달랐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합참의 명령에 따라 8군사령관의 발목을 잡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유엔군사령관은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리지웨이나 밴 플리트 모두 2차대전에서 성가를 발휘한 역전의 장군들이었고, 특히 밴 플리트는 그리스 공산반군을 토벌하는 정부군을 육성한 적이 있어 공산군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 발목이 잡힌 8군사령관이나, ‘탁상에서의 전투’인 협상에서 공산군에 농락당한 협상대표에게나 모두 심한 좌절감을 느꼈고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휴전회담 초대 대표이었던 조이 제독은 후일,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는 군사적 압력이라는 절대적 논리 이외에는 이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내와 논리도 중요한 것이기는 하나 그것이 결코 결정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다. 결국 ‘힘’만이 정의의 근원인 것이다. 우리가 ‘힘’으로 무장하지 않는 한, 우리의 주장은 관철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장을 논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고 단언하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서명하여 미군 역사상 최초로 ‘승리하지 못한 전쟁’을 결말 짓게 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자신의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공산군과의 전쟁에서 정치지도자나 장군들이 명념(銘念)해야 할 뼈저린 교훈들을 남기고 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는 한국전쟁을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치러진 잘못된 전쟁(wrong war)”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한국전쟁을 ’forgotten victory’라고 다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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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전쟁지도와 작전지휘에 있어 참모본부(합참)의 역할과 기능은 막중(莫重)하다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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