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⑧ 전쟁초기 2주간 이승만의 ‘의문투성이’ 행적

이승만은 25일 09시에 국방장관 신성모에게서 북한의 남침보고를 받았다.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후방사단을 진출시켜 반격을 감행하면 능히 격퇴할 수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26일 03시에 동경의 맥아더와 통화하고 장면 주미대사에게 미국정부에 긴급지원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27일 01시 국무회의에서 수도 사수와 철수 여부가 논의되었으나,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신성모의 보고는 여전히 안일하고 낙관적이었으나, 국무회의는 국무총리 이윤영의 제의로 수원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국회는 26일 11시에 본회의를 열었다. 신성모와 채병덕은 “적이 남침을 개시하였으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의 고충은 명령이 없어서 38선을 넘어 공세작전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공세를 취한다면 1주일 이내에 평양을 탈취할 자신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그들이 양언(揚言)하고 있던,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그대로였다. 국회는 27일 01시에 비상국회를 열어 “국회는 100만 애국시민과 같이 수도를 사수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국회의 수도 사수 결의를 전하러 경무대에 들렀으나 대통령이 철수했다는 소리를 듣고 국회로 돌아왔다. 의원들은 이승만의 철수 소식을 듣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갔다. 시민들은 반복되는 정부의 수도 사수 방송을 믿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28일 02시 30분 한강철교가 폭파되었다. 시민들은 독안의 쥐가 되어 9·28 수복까지 90일을 적 치하에 놓이게 된다.

이승만은 27일 02시 신성모가 급히 피신을 권하자 03시 30분 서울을 출발하였다. 수행원은 경무대 경찰서장, 경호경찰 1명, 비서 1명에 불과하였다. 11시 30분 기차가 대구에 도착하였을 때 정지하여 서울로부터의 정보를 취합한 후 기차를 다시 돌려 북상, 16시 30분경 대전에 도착하였다. 대전에는 서울을 탈출한 3부 요인과 고위관료들이 상당수 와 있었다. 이승만은 28일에는 수원에서 전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맥아더를 맞았다. 맥아더는 한강남단의 전선을 시찰하고 미 지상군의 투입만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음을 직감하고 이를 워싱턴에 타전하였다. 이승만은 맥아더와의 회담 후 채병덕을 경질하고 정일권을 육해공군 3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7월 1일 03시에는 대전을 떠나 목포에 도착, 소해정으로 7월 2일 11시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7월 9일 대구에 올라와 임시 정착하고 장기 체류를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7월 15일에는 내무장관을 조병옥으로 교체하였다.

6월 25일 전쟁의 시작 이후, 특히 6월 27일 서울 탈출 이후 7월 9일 대구로 이동하기까지 서울-대구-대전-수원-대전, 그리고 다시 대전-이리-목포-부산-대구에 이르는 동안의 이승만의 행적은 한마디로 의문투성이였다. 단순한 우왕좌왕이라고 부르기에는 국가원수로서 너무나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누란의 위기에서 이승만은 두 번의 통치공백, 즉 사실상의 통수권 유고사태를 빚었던 것이다. (박명림 <1950:전쟁과 평화> pp. 160-177. ‘사실상의 국가’, 이승만의 비밀탈출)

이승만의 행적이 창황망조(蒼黃罔措)임은 분명하지만, 박명림의 신랄한, 또는 신나는(?) 기술에서 건국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