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⑪ 김일성이 전쟁 전면에 나서다
북한군이 전체 전선에서 순조로운 진격을 해나가고 있는 가운데,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는 정령 ‘통일적 령도기구로서의 군사위원회를 조직’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임명하였다. 군사위원회는 그 산하에 공화국 내각의 각 성, 국들을 비롯하여 국가의 중앙기관들과 각 도와 시 지방군정부들을 소속시켰다. 각 지방군정부는 도와 시의 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인민군 대표 및 내무기관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군사위원회는 북한의 모든 정치, 경제, 군사적 역량을 전쟁승리로 총동원하기 위한 전시비상기구였다. 군사위원회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부수상 김책과 홍명희, 외상 박헌영, 민족보위상 최용건, 내무상 박일우,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 등으로 구성되었다.
군사위원회는 소련의 2차 대전시 국방위원회(GKO)를 본뜬 것이다. 국방위원회는 스탈린을 위원장으로 하고 외상 몰로토프, 재상 말렌코프, 국방상 보로실로프 등으로 강력한 전쟁지도체제를 갖추었는데 북한의 군사위원회는 이 모델을 따른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War Cabinet, 미국의 NSC와도 같다. 주목할 것은 북한은 일찍부터 이러한 선진적 전쟁지도기구를 가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NSC는 1947년에야 만들어졌다.
6월 27일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는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7월 1일에는 전시동원을 선포하였다. 7월 4일에는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는 수상 김일성을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김일성은 7월 5일 전선사령부를 편성하고 전선사령관에 부수상 겸 산업상 김책을, 참모장에는 민족보위성 총참모장 강건을 임명하였다. 이것으로 북한의 전쟁지도 및 작전지휘 기구는 대폭 강화된 모습을 갖추었다.
군사위원회의 조직, 전시상태의 선포, 동원의 선포 등은 전쟁을 하는 나라에서는 미리 계획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으나,?7월 4일 김일성이 직접 최고사령관을 맡게 된 것은 통상적인 것이 아니다. 공산당 국가에서는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최고회의간부회의 의장이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군 통수권을 갖지 않고, 그렇다고 실권자인 당 서기장이 평소 최고사령관으로 불리지도 않는다. 김일성의 최고사령관 임명은 공산국가의 통상적 방식에서 벗어나 비상사태에서 당과 정부의 실권자가 군의 지휘권을 직접 장악,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평소부터 당중앙군사위 주석을 중심으로 정연(整然)한 통수계통을 가지고 있다. 당중앙군사위 주석은 국가중앙군사위 주석을 겸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인민해방군은 기본적으로 국군(國軍)이 아니라 당군(黨軍)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김일성 등이 상황을 비상상황이라고 인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여기에는 증가되는 유엔 안보리의 외교적 압력과 함께 6월 29일 미군 폭격기 27대가 평양을 공습한 것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진주만 기습으로 환호하던 일본이 Doolittle 중령의 폭격기 편대의 도쿄공습으로 전쟁의 전도에 암운이 드리움을 직감하였던 것과 같다. 6월 28일 11시 서울을 점령하고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의기양양하던 김일성이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내린 특단의 조치가 최고사령관 취임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 무렵 소련군고문관들이 ‘앗 뜨거라’하고 자취를 감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