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⑥군지휘체제, 북한이 남한 압도

1949년 12월 육군본부의 정보판단은, “1950년 봄, 적정에 급진적 변화가 있을 것이며, 북한군은 대남 후방교란과 내부붕괴공작을 강행하여 남침의 구체적인 여건을 조성하고, 결정적인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전면공세를 취하여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1950년 1월 육군총참모장대리 신태영 소장은 “북한은 대한민국이 약화될 징조만 보이면 언제든지 공격을 개시할 것”이라고 내다보았고 5월 10일에는 “북한 괴뢰군이 대거 38선에 이동하고 있어 침입의 위협이 긴박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1950년도 초 육군본부에서는 한국방어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은 해군의 해안경비계획과 공군의 대공계획 등 부록으로 보완되어 육군 작전명령 38호로 각 부대에 하달되었다. 작전명령 38호에서는 북한군의 주공은 ‘철원-연천-의정부-서울’ 조공은 ‘개성-문산-서울’을 지향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러한 적정판단을 토대로 수립된 방어계획의 골자는 38도선을 고수하는 지역방어였다.

참모학교에서는 38도에서 적을 저지하지 못하였을 경우, 한강 이남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는 방책도 거론되었으나 구체적인 계획은 마련되지 않았다. 작전개념은 전방사단의 방어전면에 가용전력이 제한되어 있는데도 고수방어에 집착하였고, 예비전력의 융통성 있는 운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으며 예비전력도 이동수단의 부족으로 적시에 전투지역에 투입하기 어려운 점 등, 계획부터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즉, 한국방어계획은 기본적으로 상급부대의 지휘·통제보다 각급 제대의 계획과 의지, 능력에 의존하였다.

이처럼 남북한 전력의 격차와 작전계획상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전쟁이 나면 미군이 증원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38도선 전투와 빨치산 토벌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국민의 북진통일을 부추기는 발언을 하면서 상황을 그르치고 있었다. 1950년 1월 24일 내외신 기자회견 석상에서 “실지회복을 위한 준비가 다 되었으므로 다만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고, 5월 10일에는 “현재 우리 해군은 일단 유사시에는 이북에 대해 하고 싶은 행동을 어디까지든지 할 수 있는 힘과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 호언장담하였다.

북한은 이 발언 등을 트집 잡아 한국군이 먼저 북진하였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삼았고 전쟁의 전면적 전개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커밍스는 이러한 단편들을 모아 “한국의 군사적 자극이 한국전쟁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라는 주장을 펴나갔던 것이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6월 10일 전방부대 지휘관과 육본 참모의 대대적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는데 이는 비상사태에 대비한 조치라고는 볼 수 없었다. 특히 방어계획을 발전시키는데 몰두 중인 장창국 작전국장을 도미 유학 대기시킨 것은 납득이 안 가는 처사였다. 당시 이응준 신태영 김석원 등 일본군 대좌 출신의 고급장교(일본육사 26, 27기)가 있었음에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판단과 조치를 남발한 채병덕(일본육사 49기)을 육군총참모장으로 기용한 이승만과 신성모의 책임은 무어라 해도 면제될 수 없다.

국가 및 군사 지휘부(NCMA, National Command and Military Authority)로서 군통수권자, 국방장관, 참모총장격인?‘이승만-신성모-채병덕’은 ‘김일성-최용건-강건’과 상대가 안 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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