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⑦얼빠진 채병덕···전화기 꺼놓은 신성모
6월 25일 04시, 북한군은 38도선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 남침을 시작하였다. 육군본부는 전일 육군회관 준공 축하 파티 후 대부분의 고위 직위자가 명정(酩酊)상태에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고 영국의 ‘신사생활’에 젖은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일요일에는 전화를 꺼놓은 상태였으며, 장도영 작전국장의 집에는 육군본부와 통하는 전화가 가설되어 있지 않았다.(!)
주공인 북한군 1군단은 연천-동두천-의정부 접근로에 4사단(107 전차연대로 증강), 운천-포천-의정부 접근로에 3사단(109전차연대로 증강)을 투입하였다. 이를 맞아 유재흥의 7사단은 2개 연대를 전방에 배치하였지만, 예비인 25연대는 2사단에서 7사단으로 예속 변경되어 이동 중이었다. 게다가 6월 23일부터 휴가와 외출, 외박이 실시되었으므로 가용병력은 5000명 안팎이었다. 따라서 피아 전투력은, 병력이 1대7, 화력에서는 1대18의 엄청난 격차를 보인 가운데 7사단은 서울의 주 방어책임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병은 분전하였으나 국군이 장비한 대전차화기는 T-34의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장병들의 좌절감과 허탈감은 전차에 대한 공포증으로 변하였다. 북괴한은 25일 공격당일에 동두천-포천선까지 진출하였다. 26일 의정부 정면에는 2사단(병력은 2개 대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세계 전사상 드문 사관생도가 전투에 투입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포병학교 교도대 등이 증원되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들 부대를 대대단위로 축차적으로 투입하며 무모한 역습을 강행토록 요구하였는데 각 대대는 역포위당하여 분산되었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7사단은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의정부를 포기하고 말았으며, 28일 01시에 미아리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당초 육군본부에서는 북한군이 1차작전의 기본임무를 서울 부근에서 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데 둘 것으로 판단하였는데, 국군 주력을 수도권에 집중 증원한 것은 적의 이러한 작전구상을 도와준 격이 되고 만 것이다.
개성-문산을 담당한 백선엽의 1사단은 북괴군 1사단과 6사단의 공격이 개시된 후 임진강 방어선으로 철수하여 적을 저지하고, 일부 병력은 김포반도로 철수하며 주력은 봉일천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백선엽 사단장은 육본에서 증원된 5사단 15연대, 혼성 전투부대 등과 함께 28일까지 봉일천 방어선을 고수하다가 서울이 함락된 것을 확인 후 한강을 도하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침투한 적 6사단의 공격을 받아 모든 공용화기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이 창동방어선에 육박한 상황에서도 ‘수도 사수’를 다짐하던 채병덕은 적 전차가 서울시내에 들어오고 정부 및 군 지휘부가 서울을 빠져나가자 28일 02시 30분에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국군이 해주에 진입하였다는 등, 전황보도의 혼돈으로 수많은 서울시민이 피난할 기회를 놓쳤고 김규식 임정 부주석과 정인보를 비롯한 수많은 애국지사와 국가적 인재들이 북으로 납치되었다. 개전 초 9만6000명이던 국군은 28일 2만5000명로 줄어들었고 공용화기의 대부분은 유기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는 한강교 조기 폭파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채병덕의 지시를 받고 폭파를 지휘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만 책임을 지고 사형 당했다)
채병덕은 그 때,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장수(將帥)는 하루 이틀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장도영장군(당시는 대령)이 한국전쟁 발발당시 정보국장이였던 잘알려진 사실을 틀리시네요 군사평론가께서. 자자 그럼 집에 전화가 없어서 확성기로 “작전국장님 나와주세요”외치며 찾아다녀야만 했던 당시 작전국장은 누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