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⑭”제2의 덩케르크같은 철수는 없다”
북한군 6사단은 천안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군산에서 금강 하구를 도하하였다. 그 후 미 24사단이 대전을 철수한 20일에는 전주를 점령하고 남원-광주-순천 축선으로 매일 30km 속도로 남진을 계속, 목포, 보성, 여수를 차례로 점령하고 동진하여 하동-진주를 점령, 7월 말에는 부산에서 불과 50km 거리인 마산 지척에 진출하여 서쪽으로부터 부산을 우회 공격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펴려는 유엔군을 포위하고자 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7월 27일 대구로 비래하여 워커 중장을 비롯한 모든 8군 참모들이 모인 자리에서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제2의 덩케르크 철수와 같은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에는 2차대전시 영국의 덩케르크의 비극은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치욕의 상징이었다.
7월 29일 워커 중장은 김천으로부터 철수한 25사단을 순시한 자리에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땅이 없다. 현 전선의 사수냐 아니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Stand or die)는 추상같은 명령을 하달하였다. 워커의 낙동강선 방어개념의 핵심은 부산교두보를 확보하고 인천상륙을 통한 반격작전 준비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세행동으로써 적을 교란하여 인천상륙으로 공세 이전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만들어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방어기간에도 한시도 공격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7월 31일 진주가 함락되자 워커는 위기를 직감하고 25사단을 주축으로 한 킨 특수임무부대를 급거 마산으로 전진(轉進)시켰다. 25사단은 상주-마산간 240km를 36시간에 주파하여 마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이는 2차 대전시 패턴의 3군의 발지 전투를 능가하는 부대이동의 신기록이었다. 그중에서도 27연대는 사단 주력보다 2일 전인 마산으로 이동하여 마산 서쪽 진동리에서 필사적인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최고조에 이른 북한 6사단의 기세를 꺾어 놓았다. 이 전투에서 적의 기습을 받았음에도 신속히 대응하여 ‘진동리의 대역전’이라고 기록될 만큼의 대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의 탁월한 작전지휘 덕분이었다. 이처럼 전투의 승패는 오로지 지휘관(將帥)에 달려 있다. 마이켈리스 대령은 후일 대장으로 진급하여 유엔군사령관으로 한국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된다.
반면, 상주-왜관 간에는56km에 달하는 공간이 형성되어 대구의 방어가 위태롭게 되었으나, 이 방면의 북한군 15사단이 화령장 전투에서 손실 보충을 위해 부대정비하느라 지체하고 있는 시간을 벌어 백선엽의 1사단이 적의 공격개시 이전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는데, 이로써 8월 4일부터 전개된 대구 방어의 관건인 다부동전투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한달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피아간의 경쟁, 즉 아군의 증강속도와 북한군의 진격속도 사이에 벌어진 시간과 공간 확보를 위한 싸움은 8월로 접어들어 고비를 넘었다. 북한군은 병참선이 300km로 연장된 탓에 모든 보급이 부진한 데다가, 병력 손실과 보충의 균형이 무너져 전투력이 50~60%로 격감, 공세한계점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국군의 결사적인 분전(奮戰)과 워커 장군의 탁월한 예비대 운용(豫備隊 運用)이 결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