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반공포로 석방
1953년 6월 18일 자정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2만693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면도를 하고 있던 처칠이 놀라 턱을 칼로 베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세계는 진동하였다. 이승만의 결단은 세계의 정치를 읽고 있던 탁월한 안목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배우고 프린스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당시 한미 양국을 통틀어 최고의 인텔리였다. 1차세계대전 후 세계의 질서를 주도한 윌슨에게서 배운 이승만은 미주리의 시골신사인 트루만이나 1차대전 당시 맥아더의 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자신과 동격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경악하여 국무차관보 로버트슨을 서울로 급파하였다. 로버트슨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을 약속함과 아울러, 2억달러에 달하는 경제원조를 약속하였다. 이승만은 이로써 대한민국의 안보를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된다. 모든 것을 미국에 의존한 한국이 초강대국을 상대로 한, 실로 유례없는 외교적 일격(coup)이었다. 노년에 독재에 흐르고 자유당의 부패를 바로 잡지 못한 과(過)는 유감이지만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소련과 중공, 북한의 침략으로 망가진 대한민국 안보의 기반을 다진 이승만의 공에 대해서는 아무리 높게 평가하더라도 지나침이 없다.
한편, 공산측은 유엔군이 한국 정부의 포로석방을 방관하였다고 비난은 하면서도 휴전회담을 파국으로 몰고 갈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의사가 명백하였다. 당시 미국은 반공포로 석방으로 공산측이 휴전회담을 거부하고 다시 공세를 취할 경우, 중국 본토로의 확전을 각오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을 지휘한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중장은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며, 특무대장 김창룡과 함께 이승만 정권을 뒷받침하는 정치군인의 대표가 되었다. 원용덕은 연희전문학교 출신의 의사로서 만주군에서 소좌를 지냈고 6·25 당시에는 군의 장로 그룹에 속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의관 출신의 헌병총사령관, 병기 소좌 출신의 총참모장 등, 이승만의 군 인사는 참으로 창발성이 풍부하였다.
북한에서는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날을 전승절이라고 한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북한은 6·25 남침 실패로 상당한 땅을 빼앗겼다. 국군은 서부전선에서 약간 물러났을 뿐 중동부에서 훨씬 많은 땅을 차지하였다. 6·25 전에는 38선이 전곡의 초성리, 중부전선의 만세교, 동부전선에서는 가칠봉의 남쪽으로 지나갔다. 설악산과 속초는 38선 이북이었다. 휴전협정으로 군사분계선은 훨씬 위로 올라가서 그어졌다.
“어디로 돌아가기를 바라는가”는 심문에서도 대부분의 포로들은 북한을 택하지 않고 대한민국이나 중립국을 택하였다. 김일성은 전 세계인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어느 모로나 6·25 전쟁에서 북한은 패배하였다. 다만 세계 최강의 미군에게 여러 번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중공군이 1840년 아편전쟁 이래 치욕을 씻은 것은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7월 27일은 중국에게나 전승절이라고 하면 모를까 북한에게는 가당치도 않다.
[17화]에서 인용함: “일본육사 26, 27기의 녹록치 않은 대좌 출신이 많았음에도 49기 출신의 병기 소좌 채병덕을 육군의 수장으로 기용한 통수권자 이승만과 국방장관 신성모의 인사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변명과 용서의 여지가 없다.”->어리석다고 욕해놓고, 바로 [18화]에서 왠 “이승만의 군 인사는 참으로 창발성이 풍부하였다.” 이승만 숭배 멘트를 날리십니까. 창발성이 ‘똘아이다’ ‘어이없다’와 같은 뜻입니까? 원용덕이야, 군의관출신이라 여순반란 진압과정에서 참가도 못하고 수모만 당한 수준이지만, 부산정치파동당시 시다바리 역할 제대로 해냈으니 초대헌병사령관이라는 영예로운 자리를 하사하신 것일뿐. 저열한 정치군인으로서의 삶을 살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난 원용덕을 김장군님께서 이러시면 안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