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⑮백선엽과 ‘다부동 전투’

다부동 방어선은 좌측방이 낙동강에 연하여 방호되며, 유학산~가산 일대의 고지군들이 북쪽을 향하여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만약 이 방어진지가 돌파되면 아군은 10km 남방의 도덕산 부근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되는, 대구방어에 있어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북한군이 대구를 점령하려고 계획했던 8월 15일, 총공세를 개시함으로써 다부동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백선엽의 1사단 전 장병은 결사의 각오와 분전으로 방어선을 유지하였다. 1920년생으로 당시 30세였던 청년장군 백선엽은 부하들에게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쏴라”는 비장의 투혼으로 사단의 선두에 섰다. 이를 통하여 장병들은 지휘관의 생사일여(生死一如)의 투지 아래 전 장병이 단결하였을 때 어떠한 난관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16일 정오 왜관 북서쪽 낙동강변 일대에 대한 B-29 99대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래 최대규모의 융단폭격’이 가해졌다. 북한군은 폭격 이전에 이미 낙동강 동안으로 도하한 뒤였기 때문에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북괴군이 받은 심리적 효과는 대단히 컸다. 이때의 기록은 생생하게 남아있어 군의 주병인 보병이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약여(躍如)하게 보여준다. 부대가 집결하면 유엔 공군에 의하여 폭격을 당한다는 두려움은 북한군의 9월 공세 작전개념 수립에도 작용하게 된다. 최근 미 공군의 위력과시에 김정은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북한군은 가산산성을 점령하고 일부 병력이 금호강으로 침투하여 18일 새벽에는 대구역에 박격포를 발사하였다. 이날은 정부가 부산으로 천도하는 날이기도 하여 민심은 동요되었으나, 내무부와 육군본부, 미 8군사령부가 대구에서 떠나지 않고 작전지도와 치안유지에 진력하여 곧 해소되었다. 이때 조병옥 내무부장관의 용맹이 빛을 발했다. 미 군정당시 수도청장으로서 군정경찰의 대부로 불리고 이승만의 집권에도 역할을 한 조병옥이지만 후일 이승만이 독재로 흐르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서 자유당 정권의 종식을 바라는 국민의 여망을 모았던 것도 이때의 활약이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위기에 진가가 드러나는 법이다.

8월 4일에 개시된 다부동 전투는 30일에 이르러 아군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백선엽의 1사단은 다부동을 피로써 사수하여 대구를 지켜냈던 것이다. 연대장 최영희와 김점곤도 수훈갑(殊勳甲)이었다. 이로써 1사단은 춘천회전의 6사단과 함께 국군의 선봉이 되었으며 북진에서는 평양입성의 선두를 차지하게 된다. 대한민국과 국군이 존속하는 한, 국민들은 백선엽과 1사단 장병들의 투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북한이 백선엽에 대해 ‘친일파 운운’하면서 매도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핀란드의 만넬하임 원수는 제정 러시아 군에서 기병중장까지 올랐으나, 1917년 핀란드가 독립한 후에는 핀란드 군을 창건하였고 1939년 소련과의 전쟁에서는 탁월한 작전지도로 소련군을 패퇴시켜 핀란드의 독립을 지켜내고 그 공으로 후에는 대통령에까지 추대된 인물이다.

전공이 탁월한 군인에게 대한 바른 대접이란 이런 것이며, 제대로 된 나라란 이런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