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 쓰는 6·25] ③ 소련군사고문단···’철저 준비’ 북한, ‘미군 철수’ 한국
1948년 12월 국방상 불가닌의 주재 아래 소련군 철수 후 북한군 증강에 관한 회의가 열려 중공군의 송환, 기갑부대의 증강 등이 확정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결정된 인민군 증강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40여명의 소련 군사사절단이 1949년 1월 북한에 도착했다. 이들은 하얼빈에서 중공 동북인민정부 주석 주보중과 북한의 민족보위상 최용건과 회담하여 중공군 내 한인 송환문제를 논의하고 이들을 1949년 9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북한으로 송환하기로 하였다.
소련군 군사사절단은 인민군 증강계획을 현지 사정에 비추어 재검토하였는데 기갑전문가인 쿠바노프 중장은 북한의 지형 등을 감안, 2개의 탱크사단 편성계획을 1개 사단으로 변경하였다. 기갑부대의 건설은 1949년 5월 탱크여단의 창설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1948년 12월 소련군이 철수 후 남기고 간 탱크와 한인계 소련군 장교인 표도르 중좌 등의 기간요원으로 편성된 탱크연대가 1949년 5월에는 탱크 여단으로 증강되었고 1949년 8월 말에는 150대의 탱크와 8800명의 병력을 보유, 실질적인 전차사단의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 (탱크 여단은 서울 점령 후 서울근위105탱크사단으로 승격되었다)
북한군에서는 대대급은 구분대, 연대급은 부대, 사단급은 연합부대로 불렀다. 사단은 세 자리 숫자이며 끝에 5가 붙는다. 예를 들면, 1사단은 115군부대, 2사단은 235군부대, 3사단은 395군부대, 4사단은 485군부대, 5사단은 615군부대, 6사단은 665군부대…. 이런 식으로 단대호를 부여하고 나아가 1사단 A연대는 117군부대, B연대는 119군부대, C연대는 121군부대로 불렀다. 이 규칙을 알게 되면 북한군의 전투서열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병력의 증강과 더불어 다량의 장비와 군수물자가 1950년 4월에 소련으로부터 반입되었다. 이 가운데는 100대의 탱크, 60대의 자주포를 비롯하여 각종 곡사포, 박격포, 대전차포, 탄약, 유류, 수리부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막대한 양의 병기와 군수물자야말로 6·25남침에 대한 소련의 개입과 지원을 가장 명확하게 표시하는 증거다.
1949년 말 이후 이루어진 전력증강을 통하여 북한군은 2배 정도로 증강되었다. 1949년 말 현재 북한군이 5개 사단, 1개 탱크 여단, 1개 항공연대를 보유하였던 데 비해, 1950년 5월에는 7개 강습사단, 6개 예비사단, 1개 탱크 여단, 1개 항공사단, 그 밖에 독립 탱크연대, 특전대, 육전대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남침을 위한 작전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바셀리예프스키 중장을 단장으로 한 군사고문단이 스미르노프 소장 휘하의 군사고문단과 교체하여 평양에 도착한 1950년 4월 중순부터다.
스미르노프 등이 북한군을 정규군으로 육성하고 일정 수준으로의 전력증강에 주로 간여하였다면 작전 팀은 남침을 위한 작전명령을 작성하고 북한군의 작전을 지도하기 위한 일종의 통수부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스탈린은 12월에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동시에 미군의 철수도 촉구했다. 1949년 6월 트루만은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잘 준비된 북한군과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한국군이 맞붙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