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커밍스의 6·25 기원설’에 대한 반박

1950년 4월 중순 바실리에프 중장을 단장으로 한 소련군 고문관이 평양에 도착하여 남침 작전명령을 작성하게 된다. 스탈린의 개입은 인민군 창설과 증강에서 작전명령을 작성하고 작전을 지휘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본질적으로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을 내전으로 파악하는 브루스 커밍스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난처한 대목이다. (한국전쟁이 내전적 성격은 분명히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소련의 국익이었으며, 김일성은 스탈린이라는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이 작전구상이 집약된 ‘선제타격계획’은 소련이 붕괴된 후 공개된 것이나, 이 자료의 참조여부에 관계없이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보는 큰 그림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북한의 조국해방전쟁사에는 작전구상의 요지에 대해, “서울에서 적의 기본역량을 격멸하고 전과를 확대하면서 남해안으로 진격한다”는 것으로서 부연하면, “주공은 분진합격에 의한 집중으로 기습을 달성하여 최초목표인 서울을 탈취하고 조공은 병진공격으로 주공 측방을 엄호하면서 서울 남동쪽으로 우회기동하여 적의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주·조동 협동으로 적 주력부대를 격멸한다. 그 이후의 진격은 고도의 기동력을 발휘하여 신속하며 연속적인 공세작전으로 적을 추격하고 해상 및 산악지대로 침투한 유격부대는 적후방을 교란하여 주·조공의 전진을 엄호함으로써 남해안 항구까지 도달, 남한 전역을 점령한다”고 되어 있다.

소련군 작전 팀은 서울 점령이 중요하나, 한국군 주력을 한강선에서 포착, 섬멸하는 것에 보다 중점을 둔 군사적 논리를 중시하였다. 이를 위해 서울의 방어를 위해 서울 북방에 필연적으로 집결하게 되는 한국군 주력을 서울 북방 내지 한강선에서 포착, 섬멸한 후 분산 후퇴하는 잔여병력에 재편성의 기회를 주지 않고 계속적인 공격 기세를 유지한다는 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작전구상의 중심개념은 적 야전군을 작전의 주목표로 하고 적 후방에 이르는 깊숙한 종심타격(從心打擊)을 감행한다는 소련군 정통의 작전이론이었다.

이러한 작전구상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인민군 정찰국장으로부터 하달된 정찰명령으로서 작전의 진행에 따른 정찰목표의 선정 및 차후작전과의 연계에 대해 지시를 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인민군은 서울 북방에서 한국군 주력을 포착하는 것보다는 한강선 남부에 집중되는 한국군 주력과 예비대를 포위하는 보다 큰 포위(包圍)를 노리는 일종의 일정양면전(一點兩面戰)을 구상하였으며, 이를 위해 서울 북방에 1군단을 배치하고, 춘천에서 서진하여 여주에서 한강을 도하, 남한강을 연하는 선에서 한국군을 포착하는 임무를 2군단에 부여하였다.

소련군 작전 팀은 6월 25일 개전 이래 7월 15일까지 3주에 걸쳐 주요 작전은 종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는데 김일성은 8월 15일까지의 한 달은 남북한이 통일된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갖추기 위한 필수조치, 토지개혁,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등에 소요되는 기간으로 잡았을 것이다. 해방 5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을 ‘국토의 완정과 민족의 통일’을 달성하겠다는 것은 1949년 말 이래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의 공공연한 표방이었던 만큼 남침 개시일을 여기에 맞추어 역으로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노획문서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북한군 ‘하계기동연습’ 관련 문서가 발견되었다.

hindsight의 이점(利點)으로서 오늘 우리는 커밍스에 비해 훨씬 정교한 분석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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