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유재흥 2군단의 ‘영천회전’

북한군의 8월 공세는 8월 20일을 전후하여 끝났다. 북한군은 9월 2일 9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이미 공세한계점에 이르렀음에도 부산점령을 위한 마지막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마치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와 모스크바 공략에 매달린 것과 같은 김일성의 집념이었다. 북한군이 9월 공세를 위하여 남한에서 보충한 병력의 대부분은 남한 점령지역에서 의용군이라는 명분으로 강제징집한 신병들로서 북한군 병력의 3분의 1을 상회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2개 군단체제는 변경하지 않고 전선사령부 직할로 5개 공격집단을 편성, 김책과 강건이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다. 9월 공세 기간에 북한군은 해가 진 얼마 뒤에 이동을 개시하여 새벽이 되기 전에 아군 진전 100~150m까지 접근,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는 유엔? 공군과 지상포화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낙동강 동안의 미군을 공격하는 북한군 1군단은 2개 공격집단으로, 1, 6, 7사단으로 구성된 제1공격집단은 마산을 돌파, 부산을 공격하고 2, 4, 9, 10사단으로 구성된 제2공격집단은 경부선과 대구~부산 도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2군단은? 동부 산악지역의 국군 2군단을 지향하였다. 1군단은 8월 31일 밤 11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9월 2일 저녁 6시 공격을 개시한 2군단에 이틀 앞서 공격을 개시한 것은 유엔군으로 하여금 남부전선이 북괴군의 주공인 것처럼 기만하기 위한 것이었다.

9월 2일 북한군 2군단은 3개 공격집단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1, 3, 13사단으로 구성된 제3공격집단은 왜관~다부동 정면에서 대구 북방에 육박하였으며, 8, 15사단으로 구성된 제4공격집단은 국군8사단 방어정면을 돌파, 영천을 점령하였다. 동부전선에서는 5, 12사단으로 구성된 제5공격집단이 포항~경주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9월 3일, 8사단 우익에 배치된 수도사단이 북한군 12사단의 공격을 받아 안강 남쪽으로 철수하여 14km 에 달하는 간격이 형성되고 8사단의 우측이 노출되었다. 5일 새벽 1시 북괴군 15사단은 이 간격으로 침투하여 8사단을 기습, 순식간에 영천을 점령하였다. 영천은 중앙선, 동해남부선과 대구, 포항, 경주, 안동으로 통하는 도로의 분기점이므로 적이 이곳을 장악하게 되면 중·동부전선이 양단되고 만다. 이로써 국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방전이 개시된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재흥(일본육사 55기생) 2군단장은 영천이 실함되자 7사단과 1사단 11연대, 6사단 19 연대, 포항에서 복귀한 8사단 10연대 등 6개 연대를 동원하여 역습을 감행하였다. 8일 오후 2군단은 일제히 역습을 개시하여 영천에 진출한 적을 소탕하고 전과확대로 전환하였으며 12일에는 9월 4일 당시의 방어선을 회복하고 반격태세를 가다듬게 되었다.

이 전투는 북한군 9월 공세에 있어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적이 영천을 점령한 초기에는 일시 낙동강 방어선의 붕괴마저 우려되기도 하였으나 2군단의 임기응변적 대처와 적 병참선의 차단으로 북한군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 와중에서 전선사 참모장 강건이 폭사하였다. 9월 공세는 북한군의 공세종말점이었다.

이를 전사에서는 2군단의 영천회전(永川會戰)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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