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⑩ 미군참전과 ‘육해공총사령관’ 정일권

북한의 기습남침은 미국에게 마치 진주만기습을 방불케 하는 충격이었다. 미주리의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던 트루만 대통령은 24일 밤 9시(미국 시간) 애치슨 국무장관의 보고를 받고 즉각 사태를 소련의 대미 전면도발로 인식하였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루만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한국군 지원을 위한 장비 및 군수물자의 지원과 주한 미국인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해공군의 사용을 승인하고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파견하라고 지시하였다.

25일 오후 2시(한국시간 26일 04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소집된 유엔 안보리는 미국이 제출한, “북한은 침략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38도선 이북으로 북한군을 철수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침공이 계속되고 서울 실함이 시간문제가 되자 28일 04시 미국이 제출한 유엔 회원국들에게 대한 군사원조를 권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6월 30일 트루만은 맥아더에게 미 지상군의 투입권한을 일임하였다. 맥아더는 주일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24사단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당시 24사단은 큐슈 각지에 분산되어 점령군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실병력은 평시편제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실전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많았다. 출동명령을 받은 24사단장 딘 소장은 1개 특수임무부대를 한국전선으로 급파하는 한편, 사단 주력은 연대별로 출동준비를 서두르게 하였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7월 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 도착, 열차편으로 대전에 도착한 후, 평택-안성으로 북상하여 7월 5일 새벽에 오산 부근 죽미령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스미스 부대는 504명의 병력과 2.26인치 로켓트 포와 105mm 곡사포 6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7월 13일에는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국에 도착하여 임시수도였던 대구에 지휘소를 개설하였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유엔군이 조직되고 유엔으로부터 유엔군사령관의 임명을 위임받은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7월 8일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유엔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유엔군사령관이 미 합참으로부터 지휘를 받는 지금의 지휘구조는 이때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7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의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을 유엔군총사령관에게 위임하는 서한을 맥아더에게 보냈으며, 7월 18일 유엔군총사령관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유엔군과 한국군의 지휘의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1978년 한미연합사가 창설되어 한미연합사령관이 작전통제권(OPERATIONAL CONTROL)을 행사하고 유엔군사령관은 정전관리 임무만 수행하게 되었다. 1994년에는 평시(정전시) 작전통제권이 한국 합참에 이양되었고 이제는 2015년 12월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앞두고 있다.)

6월 30일 한국정부는 도미유학 중 급거 귀국한 정일권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킴과 동시에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에 임명하였다. 정일권은 영어가 우수하고 인품이 유연하여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는 한국군의 선임자로서 적임자였다. 정일권은 봉천군관학교 5기생, 백선엽은 9기생,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2기생이다. 이들은 모두 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육해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이라는 직함은 이승만이 만들어낸 것으로 “그 정도 돼야 북한이 놀라지 않겠느냐?”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으로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한미국가 및 군사지휘부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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