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일본군서도 배울 게 있었다···김석원과 채병덕

김석원 장군은 구한말 무관학교로 입교하였다가 한일병탄 이후 일본육사로 편입되어 27기로 임관, 이후 일본군 대좌까지 복무하였다. 해방 후 일본군 출신은 근신하여야 된다는 생각에서 군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육사 8기 특별반으로 임관, 1사단장으로 1949년 1월 개성지구를 담당하였다. 1949년 5월부터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잦은 국지도발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북한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내무성 예하의 38경비여단이었다. 1사단은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까지 나오는 등 용전하였는데 이때 김석원의 지휘는 탁월하였다.

당시 남북교역에 군 수뇌부가 관련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총참모장 채병덕(일본육사 49기)과 1사단장 김석원(27기)은 정면충돌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둘을 모두 예편시켰으나 채병덕은 곧 복직시켰다. 일본육사 26, 27기의 녹록치 않은 대좌 출신이 많았음에도 49기 출신의 병기 소좌 채병덕을 육군의 수장으로 기용한 통수권자 이승만과 국방장관 신성모의 인사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변명과 용서의 여지가 없다.

6·25가 터지자 김석원은 수도사단장으로 기용되어 진천 전투를 지휘하였고 북한군의 8월 공세에서는 3사단장으로 영덕, 포항 방어를 담당하였다. 이 때 3사단 후방지휘소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를 지키고 있던 학도병중대의 혈투 덕분에 아군 후방지원시설은 형산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중단 없는 보급지원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학생들이 3사단을 택한 것은 김석원이 한국군에서 가장 용장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용전과 희생은 영화 <군번 없는 용사>에 잘 그려져 있다. 그러나 카이젤 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들고 지휘하면서 일본군의 돌격전술에 익숙한 김석원과 미군 고문관들은 융화되기 어려웠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형근의 장인인 이응준(26기), 유재흥의 부친인 유승열(26기), 신응균의 부친인 신태영(26기) 등 노병도 차차 퇴진하기에 이른다.

반면, 청년장군 백선엽은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영어가 통하는 데다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등 당대 최고의 미군 지휘관들에 배운다는 자세로 지시를 잘 따르고 협조도 잘 하였기 때문에 미군이 선호하는 한국군 장성의 대표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백선엽이 만주군 출신임을 들어 친일파로 매도하는 일부 세력에게는 이 점도 눈에 가시였다. 백선엽의 명예원수 추대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백선엽은 참모총장 두 번, 제1야전군사령관 두 번, 연합참모본부총장 등 군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대장이 세 명밖에 안 나왔는데 이형근, 정일권에 비해 백선엽 장군은 전공이 우뚝하였고 대장만 7년을 달았다.

6·25 전쟁기간을 통하여 국군은 세계 최강의 미군의 전술과 무기에 익숙한 현대군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육사 출신은 클라우제비츠 등 프러시아군의 병법을 기반으로 하면서 정신전력을 강조한 일본군 특유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육사 출신은 아니더라도 김용배 최영희 장도영 등의 학병 출신도 당대의 인재들이었다. 6·25를 통하여 대군으로 팽창한 국군이 미군의 강점과 일본군의 장점을 아우를 수 있었더라면 국군은 더욱 훌륭한 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군정(軍政)의 핵심은 인사(人事)다. 군의 문민통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바른 인사가 요결(要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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