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김일성의 ‘사천왕’ 최현의 아들 최룡해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을 방문중인 최룡해는 최현의 아들이다. 최현은 동북항일연군에서부터 김일성과 동고동락한 사이다. 동북항일연군에서 최용건은 7군장, 김책은 3군 정치위원, 김일성은 2군 6사장, 최현은 2군 5사장이었다.
군(軍)은 실제로는 1,000명 규모의 연대급, 사(師)는 300명 정도의 대대급 규모였다고 판단되는데 각 제대의 명칭이 과장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일본군을 기만하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병력 확장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최용건, 강건, 김책, 최현은 김일성 정권의 사천왕(四天王)이었다. 최현은 최용건, 김광협, 김창봉에 이어 민족보위상을 지냈다. 최현은 이름이나 겨우 쓰는 무식쟁이였으나 전투감각과 경험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현의 본격적 활약은 김일성이 강계로 후퇴할 때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에 잔류, 2군단장으로서 공산군의 제2전선을 책임졌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그의 전략적 판단능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는데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판단과 대처에 있어서는 잘못한 것이 많았다.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에 북한군 패잔병들은 중부 산악지역으로 숨어들어 있다가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군우리와 장진호에서 중공군에 호되게 당하고 후퇴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후방에서 전열을 정비하려고 할 때마다 나타나는 북한군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후퇴는 거의 공황상태가 되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4일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전면 후퇴에 오르면서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가 고려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신임 8군사령관 릿지웨이 장군의 활력 있는 지휘와 뛰어난 작전지도로 유엔군은 37도 선에서부터 중공군을 격퇴시키고 릿지웨이는 전열을 정비하여 공격을 개시, 3월 14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게 된다. (이때의 릿지웨이 장군의 탁월한 작전지휘와 리더십에 대해서는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 <군과 나>에 잘 나와 있다.)
이 북한군의 제2전선을 지휘한 것이 최현이다. 우리 군은 현리 전투 등 중공군의 운동전(運動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나 북한군의 제2전선의 위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데 후학들은 이를 보다 집중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으로 본다.
6.25 초기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북한군의 중심이 전선사령관 김책이라고 한다면 후반기 중심은 최현이다. 최현이 그 후 인민무력부장을 지내고 특히 1956년 연안파를 제압하여 김일성 권력을 옹호한 공은 절대적이다. 그 아들인 최룡해가 김정은 정권의 최측근인 것은 이런 연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군인이 아니나 군을 통제하는 총정치국장을 하고 있다. 즉 체제수호의 첨병이다. 군은 이런 유래와 배경을 가진 자들이 6.25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고 2년마다 바뀌는 국군 수뇌부를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를 잘 헤아려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충분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금 북한과 우리의 국가와 군의 지휘부는 대를 이어 싸우고 있다. 압도적인 의지력과 탁월한 지혜가 승패를 결정한다. 그 바탕은 철저한 역사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