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장수왕의 평양, 김정은의 평양

평양은 고구려의 장수왕 때 수도로 정해져(427년) 1600년을 내려온 고도(古都)다. 봄이면 버드나무가 하늘거려 유경(柳京)이라고도 한다. 이 유려한 고도가 6·25 때 미군의 공습을 받아 문자 그대로 지구상에서 지워졌다. 김일성이 종전 후 전후 복구에 쏟은 노력은 대단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직후부터 1개년 계획, 3개년 계획을 연달아 추진하고 1958년에는 5개년 계획을 1년 반 앞당겨 달성하였다. 1958년은 절멸 직전에서 북한을 구원한 중공군이 철수한 시점이기도 하다.

1950년대를 북한에서 산 세대는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전후 복구를 이룩한 데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946년의 토지개혁과 1950년대 전후 복구에 있어 김일성의 지도력에 대한 북한 주민의 신뢰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통일운동가’ 김남식이 김일성에 대해서는 끝내 침을 뱉지 않았던 이유다. 우리의 5060세대가 박정희의 지도 하에 조국근대화를 이룩한 데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평양은 북한의 혁명수도다. 한양이 조선의 경도(京都)로서 정도전 등의 이념과 구상으로 만들어진 도시라고 한다면 오늘의 평양은 김일성이 소련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건설한 도시다. 이승만이 휴전 후 서울을 회복한 성취에 비하면 김일성의 평양 건설은 여러모로 앞선다. 5·16이 일어날 때 남한의 개인소득이 80달러인데 북한은 180달러였던 데서 보듯이 국가건설에서는 김일성이 한발 앞섰다. 남한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다.

평양을 둘러보면 잘 짜여진 도시라는 느낌을 받는다. 외국 관광객에게 2박3일 정도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면 좋지 않겠는가고 의견을 제시하고플 정도다. 정부의 각 요소가 질서 있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워싱턴 모뉴먼트, 제퍼슨기념관, 링컨기념관, 의회, 백악관이 ‘있을 자리에 자리하고 있는’ 워싱턴 D.C.를 보는 듯하다. 건물 색깔은 러시아풍의 연푸른색이다. 장쩌민 시대에 주로 건설된 중국의 성도(省都)들이 싱가포르 리콴유의 조언을 받다보니 영국풍의 붉은 벽돌(red bricks)로 만들어져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1942년생인 김정일은 어린 시절 평양의 건설과정을 보고 자랐는데 선전 선동 비서로서 여러 아이디어도 직접 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3년생인 김정은은 평양이 잿더미로 화한 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다. 요즈음 미국에 대한 핵공격 운운하나, B-52, B-2, F-22가 퍼붓는 재래식 폭탄만으로도 평양은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화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이룩한 그나마의 자랑이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김정일의 7·1 경제조치를 이끌던 대표적 박범주를 다시 기용하는 것을 보면 김정은도 만만치는 않은 것 같은데 저희들 말마따나 ‘핵과 경제를 함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핵은 분명히 포기하되, 당장 내놓지 않고 북한의 자력갱생(自力更生)이 가능한 때까지는 일종의 보험으로서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중국은 이를 감내하고 북한을 도울만한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핵확산은 즉각 중지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북핵문제의 해결은 이 길 밖에 없다. 아니면 ‘더 폭격할 표적이 없다’던 평양으로 되돌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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