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조선건국 설계자 정도전을 주목하는 이유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조선 건국은 이성계와 성리학자들의 합작품이다. 이성계는 고조부 이래 함경도에 이주하며 여진족 가운데서 살아온 일개 무변이었는데 북로남왜(北虜南倭)의 혼란기에 무장으로 공을 세워 출세 기회를 잡았다. 성리학자들은 무인정권과 몽고 침략, 불교 타락으로 형해화한 고려의 지도층에 새롭게 등장한 신진 엘리트로서 길재, 이색, 정몽주 등 최고의 명사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고려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지향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정몽주와 이색 문하에서 수학하던 동문이었다. 그는 일찍이 당시 세도가였던 이인임의 친원정책을 공격했다가 천민부락에 유배당했는데 이 기간 경제 곤궁과 이로 인한 참담한 생활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정치부패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도 함께 체험하면서 순박한 백성에 애정을 품게 되고, 백성들을 위한 참되고 바른 정치의 실천을 이상으로 품게 되고 그런 정치를 함께 실현할 인물을 찾게 되었다.

정도전은 근본적인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군부의 실력자 이성계와 손을 잡았다. 그는 이성계 주위에 몰려드는 야심 많은 정치인들을 규합하고, 조준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만드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이성계와 정도전, 조준 등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혈통을 문제삼아(신돈과 관련 있다는 설)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 다음에는 공양왕을 위협하여 이성계에 선양(禪讓)하는 형식을 취하여 조선을 건국했다. 정도전은 정궁을 景福宮으로 짓고, 근정전의 명칭을 지었으며 숭례문과 흥인지문, 광희문 등 한양의 4대문 4소문의 이름을 지었다. 한마디로, 정도전은 조선의 설계자였다. 그는 임금과 관료와 백성의 관계를 삼각으로 설정했다. 군주는 이상적인 유교 국가의 표상이었고, 관료제는 그러한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정도전은 이 둘이 제대로 결합된다면 이상적인 민본정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군주에 대한 관료의 충성은 군주와 정치공동체에 대한 충성이기 때문에 귀족 가문 또는 세도가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그들만의 독점적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일하는 가신의 충성과는 다르다.

이는 수백년 후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관료’의 이상형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는 왕위를 세습해가는 과정에서 항상 현명한 후계자들이 나와 계속 이어갈 것을 보증할 수 없기 때문에 군주는 상징적으로 군림하면서 정치의 표준을 세우고, 실제 정치는 재상이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동양에서 재상중심사상은 춘추전국시대로 올라가는 오랜 것이다. 정도전은 왕건이 북방정책을 취했던 것은 “옛 국경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찬양했다. 새롭게 건국한 조선이 明과 문화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시하면서도 우리의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시 明은 元이 물러간 이후 만주에 대한 영토권을 확실히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도전의 요동 공격은 이런 틈새를 노린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정도전은 명으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혔는데, 정도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은 전략가이기도 하였다. . 정도전은 ‘백성이 본이 되는 정치’(民本政治)를 추구했던 경세가, 전략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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