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한국사 ①] 역린·기황후·해품달·대장금···‘팩션’이 인기인 이유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현빈이 주연한 영화 <역린>은 정조 즉위 1년, 정순왕후와 손을 잡은 노론 벽파가 궁궐에 자객을 보내 왕의 암살을 시도하고 반정을 꾀했으나 실패한 사건을 그렸다. 영화는 정조와 정순왕후, 노론 벽파의 주요 수장 뿐 아니라 왕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한 내시와 비밀리에 노론의 의뢰를 받고 자객을 길러내는 청부업자, 정적편에 속해 있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왕을 돕는 나인 등 다양한 인물들 이야기를 그린다. 이들이 얽힌 사건이 진행되는 시간은 영화상으로는 단 하루, 24시간이다.
잘 알려진대로 이 영화는 실제 역사에 기록된 ‘정유역변’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기록된 역사와 영화 속 내용이 부합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노론의 사주를 받은 자객이 궁궐에 침입해 왕의 시해를 시도했으며 결국 발각돼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은 허구이며, 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의 역할을 하는 내시와 자객, 궁녀, 청부업자 등은 기록에 등장하지 않거나, 언급됐다 하더라도 실제와는 전혀 다르게 꾸며진 인물이다. 결정적으로 영화의 절정처럼 정조가 활과 칼을 들고 자객 및 반란군과 직접 싸우거나 한 일은 없거나 기록되지 않았다. 물론 현빈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정조가 존현각의 침전에서 상의를 벗고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몸만들기에 열중했다는 기록도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777년 7월 28일엔 “궁궐내에 도둑이 들어 사방을 수색하게 하다”라는 요지로 정조의 행적을 기술했다. 이에 도승지 홍국영이 변란이 의심되므로 샅샅히 수색해야 한다고 왕에 청을 올리고 정조가 수락했다고 덧붙여져 있다. 그러니까 영화처럼 단 하루 동안 모든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날 이후 며칠간 정조의 행적은 ‘대신들에게 도둑 든 일을 일러주고 궁궐을 숙위케 하다’ ‘금중의 변괴로 이어(移御)를 윤허하고 수비를 더할 것을 명하다’ ‘창덕궁으로 이어하다’ ‘궁내 도적 침입으로 우포도 대장을 파직하다’ ‘궁궐 담장을 수축하게 하다’ 등으로 기록됐다. 즉 왕의 호위와 궁궐의 수비를 강화했으며, 거처를 존현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고, 철저한 수사지시에도 범인을 잡지 못한 관료를 해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리고 첫 사건 후 2주 정도가 지난 8월 11일 다시 한번 수상한 자가 궁궐로 침입을 시도하다 발각되고 이것이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전군 이찬을 추대하기 위한 반정 세력의 음모였음이 드러난다.
역사왜곡 논란 비껴가며 대중욕망과 지향 반영
지난 4월 30일 개봉해 380만명을 동원한 영화 <역린>은 최근 사극의 경향인 ‘팩션’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팩션’이란 팩트(fact, 역사적 사실)와 픽션(fiction, 허구)이라는 단어를 합성한 말이다. 팩션은 사료로 남은 사건과 실존인물을 근간으로 하고, 핵심적인 인과관계를 흐트러뜨리지 않되,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공백을 상상력으로 꾸며내 재구성하는 영상이나 소설 등 서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사로 드러난 사건과 인물의 이면을 그럴 법한 추리로 창조해내고, 그것으로 역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동시대 대중들의 욕망을 반영하는 일이다. 역사를 소재로 한 모든 서사물이 사실과 허구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다 팩션이라고 이르진 않는다. 팩션으로서의 자격과 완성도를 좌우하는 것은 역사로 기록된 사건의 기승전결이나 실존인물의 행적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전에 없는 추리와 상상으로 사료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팩션과 구별되는 정극 혹은 전통사극은 추리나 상상보다는 기록된 역사의 기승전결이나 인물의 행적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다.
팩션과 흔히 혼동하는 ‘퓨전 사극’은 특정시대를 배경으로 하나 정사나 왕조사 중심에서 벗어나 가상 인물 혹은 사료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정치와 권력투쟁보다는 멜로나 액션에 치중하며, 당대의 복식이나 언어, 풍속 등을 그리는데 고증보다는 현대인들의 감각에 맞도록 스타일화한 사극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KBS 드라마 <정도전>은 전통사극에 가깝고, <기황후>나 <이산> <대장금> <해를 품은 달> 등은 퓨전사극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역사 속에 나타난 한글창제과정의 기승전결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그 이면을 가상의 사건이나 가상의 인물, 실존인물의 가상 행적으로 재구성한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왕의 남자> <광해>등과 함께 ‘연산군일기’(공길이 논어를 외어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와 ‘광해군일기’(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라)의 한 대목에서 출발한 팩션의 또 다른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픽션이란 날개 달아 흥미진진
그러나 팩션과 픽션, 전통사극, 퓨전사극 사이의 구별은 애매하며 최근의 역사드라마는 어느 정도 팩션을 지향한다. 창작자들에게는 고증의 압박이나 역사왜곡 논란을 비껴나 좀 더 자유로운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팩션이 대중들의 욕망과 지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거대담론이 무너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이나 납득불가능한 현상이 잇따르는 현대 사회에서 ‘인지부조화’를 겪는 대중들이 쉽게 빠져드는 것이 바로 각종 음모이론이며, 이것이 역사에 적용된 형태가 바로 ‘팩션’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본격 팩션으로 불리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간다.
팩션이든, 전통사극이든, 퓨전사극이든, 우리의 사극으로 돌아오면 역사적 기록의 틈을 파고들어 펼쳐낸 상상의 공간은 결국 대중의 열망에 바쳐진다. <역린>은 정조를 세상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으며 누구보다도 따뜻한 가슴을 간직했고, 용의주도한 전략과 지성, 그리고 누구라도 베어낼 수 있는 전투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낸다.
현빈의 정조는 결국 현실에 없어 더욱 간절한, 지혜롭고 헌신적이며 정의로운 영웅이다. <정도전>에서 정도전은 난세에 이상국가로서의 조선을 설계하려 했던 지식인이며, <기황후>에서 기황후는 남성으로 둘러싸인 국가, 왕조간 권력투쟁에서 성공한 여성지도자다. 당대최고의 관상쟁이라는 가상 인물의 눈을 통해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대결을 그린 <관상>은 피눈물없는 권력자들의 쟁투가 아니라 이름없는 이들의 연민과 의리, 그리고 혈육의 정이야말로 슬프지만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라는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을 상상으로 메우는 팩션은, 그러므로 대중들이 역사를 스스로 설득하는 방식이자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