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한국사 ⑨] 역사속 폭군 수양대군·연산군이 영화선 왜 인기인가?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조선시대 왕들의 이야기는 영화와 드라마 소재로 꾸준히 활용되고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를 비롯해, 한글을 만든 세종,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흉포한 왕인 연산군, 개혁군주인 정조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큰 인기를 모았다. 특히 조선왕조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꼽을 수 있는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주인공인 수양대군은 주변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덧씌워 끊임없이 ‘변주’되고 있다. 이 사건에는 왕권과 신권의 갈등을 비롯해 야망과 명분의 충돌, 절개와 야합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어 대중에게 재미를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종의 장자인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남지, 김종서 등에게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왕세자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은 1453년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인 후 “김종서가 모반(謀反)하였으므로 주륙(誅戮ㆍ죄인을 죽임)하였는데, 사변이 창졸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수양대군은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들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 계획에 따라 황보인을 비롯해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다. 또 좌의정 정분(남지가 병으로 사직한 후 좌의정에 오른 인물)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한 패가 돼 왕위를 빼앗으려 했다”고 거짓 상주해 그를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했다.

계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계유정난이라고 한다. 계유정난 이후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의정부영사와 이조ㆍ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했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아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그는 또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기도 했다.

계유정난을 소재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 <관상>

2013년 9월 개봉해 9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성공을 거둔 영화 <관상>은 계유정난이라는 팩트(factㆍ입증할 수 있는 사실)에 역모의 상을 보는 인물이라는 픽션(fictionㆍ허구)을 첨가한 팩션(factionㆍfact+fiction) 사극이다. 이 영화에는 계유정난을 다룬 여러 작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해온 한명회도 나온다. 그는 계유정난의 설계자로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영화는 사대부 중심으로 서술하는 기존 사극과는 달리 역모 누명으로 몰락한 관상가 양반을 내세워 극을 흥미진진하게 풀어간다. 관상 보는 재주로 집안을 일으키려는 주인공을 통해 권력의 비정함과 시대적 상황 앞에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소시민의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냈다.

역적의 자식이라는 누명을 쓰고, 외딴 바닷가 마을에 칩거하고 있던 조선 최고의 관상가 내경(송강호)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관상가이자 기생 연홍(김혜수)의 제안을 받고, 처남 팽헌(조정석)과 함께 한양으로 향한다. 그의 아들 진영(이종석)은 운명을 믿고 사는 아버지와 사사건건 충돌하다 과거에 급제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겠다며 집을 떠난다.

한양에 도착한 내경과 팽헌은 연홍의 사기극에 속아 어쩔 수 없이 무보수 관상을 봐주던 중 우연히 관상으로 범인을 잡아내는 실력을 발휘하며 당대 실력자 김종서(백윤식)의 눈에 든다. 김종서는 내경을 문종(김태우)에게 천거하고, 내경을 불러들인 문종은 내경에게 자신의 주변 인물 중 역모의 상을 찾아내라는 명을 내린다. 김종서를 도와 수양대군의 역모를 막으려던 내경은 아들 진영이 벼슬을 얻은 후 자신의 소신과 아들의 미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초반 송강호와 조정석의 코믹한 연기로 관객을 여유롭게 만든 영화는 중반 이후 역사적 사실에 집중하며 긴장감을 높인다. 또 관상을 통해 사람의 성품을 잡아내는 장면들이 큰 재미를 선사한다.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권력의 허망함을 비유하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는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연홍은 수양대군의 연회에 몰려든 관상가들을 보며 “조금이라도 강하다 싶으면 이리도 몰려드는지. 누가 어린 왕의 편에 서려하겠소”라고 말한다. 또 내경이 왕의 의복인 붉은색 용포를 입고 나타난 수양대군 앞에서 벌벌 떨며 “안면 다섯 봉우리가 삼각산 기세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고 거짓 관상평을 내놓자 수양대군은 “내가 왕이 될 상인가? 빨리 결정해야 되지 않겠나. 이미 왕이 돼버린 다음에는 너무 늦어 버릴 테니 말일세”라고 엄포를 놓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를 만난 내경이 “나는 얼굴을 봤을 뿐 시대의 모습을 보지 못했소.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를 본 격이지. 그 파도를 만드는 건 바람인데 말이오”라고 자조적으로 내뱉는 대사는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하지만 김종서와 수양대군 등 실존인물에 대한 묘사는 아쉬움을 남긴다. 이 영화의 연출자 한재림 감독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 인물을 그리기 보다는 영화적 재미에 몰입해 등장인물의 단편적인 특징만을 강조했다. 야인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6진을 설치해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는 등 강인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김종서가 소인배처럼 그려졌으며, 수양대군은 시대적 사명과 왕권강화의 논리를 뒤로 한 채 그저 개인적 야망만을 위해 폭주하는 인물로 묘사됐다.

계유정난을 소재로 한 드라마 <한명회>도 큰 인기를 모았다. 1994년 초부터 1년간 방송된 KBS 사극 <한명회>는 한명회의 인간적인 모습에 집중했다. 이 드라마는 극 초반 변변한 관직 없이 설움을 받던 한명회를 보여주다 그가 수양대군과 만난 후 야망을 키우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펼쳐냈다. 이 드라마는 또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는 충직한 인물이지만 능글맞고 간교한 모사꾼으로 그렸다. 드라마에서 한명회 역을 맡은 이덕화는 한명회의 용모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당나귀의 귀 모양으로 분장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왕과 비>도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해 김종서 등을 무참히 죽인 계유정난을 다뤘다. 이 드라마는 당초 문종의 승하 직후부터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가 정치적 야망을 이루는 이야기까지를 다룰 계획이었으나 후속 작품의 방영이 연기되며 연산군 시대까지 다루게 됐다. 초반에는 세조(임동진)의 모습이 부각되다 중반부 이후 인수대비(채시라)에 집중한 후 후반부에는 연산군(안재모)과 인수대비간의 갈등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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