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한국사 ⑦] 팩션(Faction)의 재구성 ‘구텐베르크의 조선’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지난 1천년간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 미친 사건은?

지난 1천년 동안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미국의 <라이프>지는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금속활자 발명’을 꼽았다. 그리고 독일 마인츠의 인쇄업자 구텐베르크에게 그 영예를 돌린다. 세계는, 특히 서구인들의 대부분은 1455년 <42행 성서>를 활판인쇄로 찍어낸 구텐베르크를 금속활자의 최초의 발명자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대개의 한국인들은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혼란을 느낀다. 왜냐하면 구텐베르크보다 약 220년 앞선 1234년경 강화도에서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현재까지 발견된 금속활자 인쇄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발견된 <직지>가 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금속활자 최초의 발명자인가? 구텐베르크인가 아니면 중세의 한국인인가? 물론 금속활자 발명이 위대한 사건으로 선정된 이유는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이 그 이전까지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책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대변혁을 일으켜 문명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금속활자 기술의 발명은 한국이 빨랐다고 해도 실제로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지식정보혁명을 가져와 인류문명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므로 그에게 영광을 헌정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대개의 한국인들은 뭔가 아쉬운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나 역시 그랬다.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서 열린 ‘국제도서전람회? <사진=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람회>

앨 고어의 한마디에 내 가슴은 벌렁거렸다

그런데 2005년 5월, 우연히 ‘서울디지털포럼 2005’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포럼에 참석한 앨 고어 전(前) 미국 부통령이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뒤 얻어온 기술”이라는 정말 놀라운 소식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사실이라며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 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까지 했다.

그 순간 평소에 품고 있었던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선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사이에 실제로 어떠한 연결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동서의 문명교류는 15세기 이전에도 다양하게 존재해 왔기에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떠한 교류의 가능성이 있겠다는 추측이었다. 나는 급히 관련 자료를 조사하여 한 장의 기획서를 작성했다. 기획안의 제목은 ‘팩션-금속활자의 길’. 하나의 새로운 팩션(Faction=Fact+Fiction)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기획작업에는 팩트를 기반으로 해서 서사적 상상력이 결합되었다.

이 경우 픽션은 팩트를 바탕으로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인데, 어디까지나 합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극적인 재미를 위해 개연성을 무시하는 설정이나 전개는 최대한 절제한다. 상상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지 세계의 객관적 질서를 무시하는 몰합리적 공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의 금속활자 장인과 구텐베르크가 연결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부분일 터였다. 출판사에서는 기획의 의미뿐 아니라 상업적 가능성까지 공감하며 팩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작품을 직접 집필할 작가로는 오세영 작가가 최적이었다.

그는 이미 <베니스의 개성상인>이라는 동서문명 교류를 소재로 한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경험이 있었고, 역사를 바탕으로 빈 공간을 채워가는 분야에서는 최적의 작가라고 판단했다. 곧바로 오세영 작가를 만났고 얼마 후 작업을 해보겠다는 회신이 왔다. 기획안을 바탕으로 추가적인 조사와 구상이 진행되었고 기본골격을 잡아 나갔다. 상상으로만 추측했던 사건이 눈앞에 형상화 되는 흥미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오세영 작가는 조선을 방문했다는 교황청의 사절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했고,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이라는 실존인물을 발견했다. 그는 구텐베르크의 고향친구로 교황청 사절단의 일원으로 동서문물이 활발하게 교류되던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더구나 교황청의 중요사업인 <42행 성서> 인쇄를 친구인 구텐베르크에게 맡긴 인물이었다.

15세기 독일 마인츠 출생 구텐베르크. 그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은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사진=위키미디어>

교황청 사절, 구텐베르크 그리고 장영실의 만남?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교황청의 사절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에 그가 조선을 방문했다면 그에게 금속활자 인쇄술을 가르쳐준 조선 사람은? 조선 금속활자의 백미인 갑인자 주조를 주도한 장영실일 확률이 가장 컸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 사절이 세종 때 조선을 방문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이상의 비약은 공상이 된다.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그런데 교황청쪽 기록에 ‘신원이 알려지지 않은’ 한 인물이 1452년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 소개로 교황 니콜라우스 5세를 알현했다는 기록을 찾았다. 그는 <42행 성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보고하여 금속활자의 완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신원 미상의 이 사람이 바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과 구텐베르크, 그리고 인쇄술을 하나로 묶어주는 인물이었다.

여기서 다시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왜 그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한 신원이 알려지지 않았을까. 혹시 아직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방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이방인이라면 어느 곳에서 온 사람일까. 당시 독일보다 뛰어난 인쇄술을 가진 곳은 조선밖에 없었고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은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 드디어 조선의 금속활자와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 사이에 끊어졌던 길이 이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그 후 2년 여, 2008년 초 마침내 원고가 완성되었다. 출간 제목은 <구텐베르크의 조선>으로 정해졌다.

사실 유럽이 한국 인쇄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은 유럽 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이미 고려시대부터 한국의 인쇄술이 중국에 전해지고, 다시 원과 명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2005년 10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람회’를 계기로 한국과 독일의 학자들이 ‘새로운 발견, 활자로드를 찾아서’라는 학술모임을 열었는데, 금속활자 전파에 관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한 자리였다. 당시 참석자들은 두 나라의 금속활자 인쇄가 문명교류사적으로 여러 중간고리를 포함한 실크로드 경로를 통해 연결되었을 개연성이 짙다고 하면서, 이 경로를 ‘활자의 길(활자로드)’이라 이름지었다. 가설이기는 하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은 당시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던 인쇄기술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동서문명 교류의 산물이며, 그것이 서양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은 누구도 쉽게 부인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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