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한국사 ⑥] 연산군 흥청망청이 낳은 ‘왕의 남자’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영화 <왕의 남자>
‘이야기의 힘’으로 승부수를 던지는 <왕의 남자>는 연산군의 이야기다. 이준익 감독은 ‘조선최초 궁중광대’라는 허구의 사실을 결합해 연산군의 비극을 새롭게 조명해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 연극 <이(爾)> (2000년 초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과는 달리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 연산군도 가지지 못한 광대들의 자유와 신명, 그로 인해 이용당하고 음모에 빠지는 광대들의 외줄타기 슬픈 운명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남사당패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양으로 올라온다. 이들은 연산군(장진영)과 그의 애첩인 녹수(강성연)를 풍자하는 놀이판을 벌여 세상의 이목을 끈다. 왕을 희롱했다는 죄로 의금부에 갇힌 장생은 “왕이 보고 웃으면 희롱이 아니니 왕을 웃겨 보이겠다”고 큰소리친다. 재치로 위기를 벗어난 장생 일행은 궁중광대가 되고, 이들은 그 뒤로 궁궐 내에서 펼쳐지는 온갖 암투의 도구가 된다.
왕은 광대패를 교묘하게 이용해 정적들을 쳐 나간다. 왕의 광대이자 꼭두각시가 된 장생은 더 이상 사람이 죽어나가는 꼴을 보기 싫어 궐을 나가려고 한다. 이야기는 한 판 신나게 노는 광대놀이와도 같다.
원작과 영화의 모티브는 <연산군 일기>다. 연산군 재위 기간을 기록한 실록이다. “공길이라는 광대가 왕에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니 비록 곡식이 있은들 먹을 수가 있으랴’는 말을 했다가 참형을 당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미천한 신분인 광대가 왕을 꾸짖는 발언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최고와 최하 신분의 두 인간이 만나 사건이 벌어졌다는 팩트는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가 아닐 수 없다. 2006년 <왕의 남자>는 영화 관련 주요 상을 휩쓴다. 그 해 한국영화 흥행 순위 1위, 역대 한국영화 흥행 순위를 갈아 치운다. 1230만의 관객을 동원한다.
조선 열번째 왕인 연산군(燕山君·1495~1506)은 음행과 패악의 폭군으로 불린다. 선정이나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애초부터 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한 위인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 사랑 없이 자란 탓인지 괴팍하고 잔인한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연산군은 성종의 장남으로, 성종이 죽은 후 왕위에 올랐는데, 무오사화를 일으키기 전까지는 성종의 업적을 이어 무난한 통치를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신들의 세력 다툼에 시달리고 거기에 생모인 폐비 윤씨와 관련된 사실을 알고 난 후에는 정치에서 손을 놓고 향락에만 몰두한다.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의 두번째 왕비인 폐비 윤씨는 질투가 심하다 하여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난 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성종은 윤씨 일을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바 있어 아무도 그 일을 입에 담지 못했다. 성종의 맏아들인 세자 융은 자라서 즉위, 연산군이 될 때까지 이 일을 알지 못했다. 왕이 된 후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엄씨가 자신의 어머니를 모함해 내쫓았다고 해서 두 후궁을 직접 죽여 바깥에 버리게 했다. 또한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위에 찬성하였다 하여 조정 대신 수십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관에서 꺼내어 시신을 토막내는 극악한 형벌)했다.
반정(反正)은 글자 그대로,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옳지 못한 임금을 폐위하고 새 임금을 세워 나라를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중종반정(연산군 12년)은 신하들이 패악을 저지르고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연산군을 폐하고 다음 서열인 중종을 왕으로 내세운 사건이다. 즉 관료 쿠데타다.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기록되고 있는 중종반정은 1506년 9월1일 연산군의 폭정을 보다 못한 일부 중신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켰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성희안, 무관 박원종이 반정군의 핵심이다. 대궐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반정군은 연산군을 동궁에 연금하고 성종의 둘째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11대 왕 중종으로 옹립했다. 연산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1506년 강화에서 사망했다. 나이 31세, 재위기간 12년이었다. 연산의 첩으로 왕을 치마폭에 가지고 놀았다는 기생 출신 장녹수는 반정군에 의해 즉결 처형당했다.
‘흥청대(거리)다’는 ‘흥에 겨워 마음껏 거드럭거리다’는 뜻의 동사인데, 우리가 지금도 흔히 쓰는 이 말의 유래는 연산군 대에서 나왔다. 연산군이 기생 ‘흥청’들과 어울려 노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 나라 다스리는 일은 멀리 하고 향락과 쾌락에 빠져 있던 연산군은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 연회에 쓸 여자들을 뽑아 각 고을에서 관리토록 했다. 대궐로 뽑혀온 기생들에게 연산군이 직접 ‘흥청’(興淸)이라 명칭을 내렸다. 수천명에 달했고 등급까지 매겨져 관리됐으며 양민의 아내나 딸까지 징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왕실 전속 기생들을 유지하는 비용은 모두 국고에서 나갔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연산이 궁 바깥으로 놀러갈 때는 ‘거사’(擧舍, 요즘의 캠핑카)를 들고 가 아무데나 세워놓고 흥청들과 유흥을 즐겼다. 결국 연산은 왕좌에서 쫓겨났고, ‘흥청거리(대)다’는 말로 오늘날까지 남게 됐다. 흥청망청은 흥청 뒤에 후렴구처럼 ‘망청’을 붙인 낱말로, 앞의 ‘흥’자와 대구를 이뤄 망할 ‘망’(亡)의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