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찬일의 영화보기] 이준익 감독 ‘동주’, 윤동주 vs 송몽규 개인사 넘어 한일간 사회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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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전찬일 영화평론가, 부산국제영화제 연구소장, 한국외대 대학원 겸임교수] <왕의 남자>와 <사도> 등을 빚어낸 이준익 감독의 11번째 연출작 <동주>는, 그의 전작 중 최고작이란 평가가 손색없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면서도 정작 그 삶(1917∼45)을 “TV나 영화에서 본 적이 없던 감독의 의문에서 출발했다”는 <동주> 영화는 “윤동주의 시가 어떤 시대와 사람들을 거쳐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온전히 스크린에 담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을 거의 완벽하게 형상화·음향화·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흑백 사진으로만 봐오던 윤동주 시인과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모습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흑백 화면을 선택했다”는 감독의 작의부터가 성공적이다. 색채 촬영보다 훨씬 더 섬세한 작업을 거쳐야만 하는 흑백 이미지는 시대적·영화적 진정성을 확보해준다.

영화 속 인물들의 삶과 사건들을 한층 더 드라마틱하게 부각시켰다. 흥행에 불리할 게 틀림없건만 위험부담을 짊어질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까. 동주 역의 강하늘은 윤동주의 현현(顯現)이라 할만하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가 더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배역에 그토록 욕심을 냈다는 유아인을 뿌리치고 그를 선택했다는 감독의 판단은 적중했다. 영화를 본 이들은 윤동주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강하늘을 연상하게 될 것이다. 이순신 하면 최민식, 세종대왕 하면 한석규를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새로운 길’, ‘별 헤는 밤’, ‘참회록’, ‘서시’, ‘자화등’ 등 윤동주의 삶에서 결정적인 계기들과 맞물리는 13편의 시를 낭송하고, 영화의 말미를 장식하는 주제곡 ‘자화상’을 직접 부르는 솜씨도 일품이다. 그의 시 낭송은, 목하 이 땅에서 불고 있는 ‘윤동주 열풍’을 한껏 더 달굴 공산이 크다. 1955년 옛 활자체를 그대로 살린 윤동주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복제 출판본이 출간 두달 만에 5만부가 팔리고, 2012년 초연과 2013년 재공연에 이어 세번째로 창작가무극 <윤동주, 달을 쏘다>가 3월20∼27일 예술의 전당 CJ토월극장에서 무대에 오르는 등의 유의미한 열기를. 각본을 쓰기도 한 신연식 감독(<러시안 소설>, <배우는 배우다>)이 작사하고 김신일이 작·편곡한 주제곡은 명품 OST로 평가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몽규 역의 박정민은 또 어떤가? 연기를 위해 “촬영 전 홀로 중국 용정에 있는 윤동주·송몽규 생가와 묘소를 방문했다”는 그 또한 몽규의 모습 그대로다. 강하늘과 마찬가지로 황정민 추천으로 캐스팅됐다는 그는 가히 ‘신의 한수’다. 윤동주보다 3개월 여 먼저 태어나고 20여일 뒤 사망한 송몽규는 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절친’이며 경쟁자로, ‘윤동주에게 생애 첫 열등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킨 존재’다. 윤동주는 붙지 못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의 글재주를 지

니고 있었으나, ‘시대가 요구하는 혁명가가 되려 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윤동주는 평생 송몽규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중앙일보> 2월16일자 25면) 윤동주의 열등감 내지 종속성은 흥미롭게도 감독의 연기 연출에도 고스란히 투영된다. 강하늘이 단독으로 나오거나 박정민이 아닌 다른 배우들과 함께 화면에 잡힐 때와는 달리, 박정민과의 투쇼트에서는 거의 늘 그가 압도당하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단언컨대 강하늘이 연기를 못하거나, 박정민에 꿀려서는 아니다. 감독은 인물구도에 부합하는 연기를 체화시킨 것이다. <동주>는 따라서 제목이 시사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 시문학사에 빛나는 위대한 시인에 관한 전기물은 아니다. 영화는 시종 어둠의 시대에 맞서 저항하며 싸웠던 두 청춘의 삶과 관계, 죽음 등에 초점을 맞춘다.

시 전문 계간지 <시와 소금>의 좌담 ‘시, 영화로 읽다’에서도 밝혔듯, 영화 <동주>가 남 다르게 다가서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비교적 잘 아(는 것처럼 여겨지)는 유명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상대적 미지의 인물을 조명함으로써, 자칫 통속적 전기물로 흐를 수 있을 영화를 비통속적 휴먼드라마로 승화시켰다는 것이다. 관점·시선의 전환이랄까? 동주와 몽규 두 주인공에서 더 나아가 제3의 주인공에게 눈길을 던지면, 또 한 차례의

관점 전환이 이뤄지면서 영화의 비통속성은 비범함으로까지 비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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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에서 고등형사로 열연한 김인우

대부분 언론 보도가 ‘강하늘/윤동주-박정민/송몽규’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내 눈길을 가장 강력히 끌어당긴 인물은 다름 아닌 동주와 몽규를 심문하는 고등형사 역이며, 그 역을 연기한 김인우라는 배우다. 김인우 그는, 강하늘과 박정민 못잖은, 아니 어느 모로는 능가하는 ‘당당한 주연’으로 열연을 펼친다. <동주>는 1969년생인 김인우의 첫 주연작이다. 명색이 영화평론가이면서도 그를 배우로서 선명히 인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암살>에 조연으로 나왔다는데, 부끄럽게도 기억조차 못했다. 그는 <동주>를 통해 비로소 자기만의 얼굴과 이름을 ‘확실히’ 획득한 것이다. <암살>에서 최덕문이 폭탄 전문가 황덕삼 역으로, <완득이>에서 박수영이 완득이 아버지 역으로 그랬던 것처럼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성취인가. 극 속에서 그 이름이 불리어졌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눈 여겨 봐야할 사실은, ‘보도자료’에 주연이라면서도 이름 없이 그저 고등형사로만 나와 있는 것이다. 이름 없는 주연이라,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내가 이 인물에 특별히 주목하는 연유다. 그는 분명히 악역이면서도, 그간 우리가 이런 유의 영화에서 목격해온 그런 잔인무도한 악당이 아니다. 그는 투옥 중 일종의 생체 실험으로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던 동주와 몽규 두 사람을 최후의 순간까지 회유 내지 설득하려 무던히 애쓴다. 폭력적, 육체적 고문이 아니라 지적·정신적 접근으로 말이다.

영화 <동주>가 동주와 몽규를 중심으로 한 개인사는 물론 한국과 일본의 원한관계를 진단하는 사회사로도 읽히는 건 이 이름 없는 일본을 대변하는 상징적 존재, 고등형사를 통해서다. 문득 밀려드는 물음. 혹 이준익 감독이 <동주>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 지점에 있는 건 아닐까.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날로 높아져만 가는 한일간 긴장, 갈등, 반목, 충돌 등의 근본원인으로 일본의 지적·정신적 식민화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적잖은 한국의 기성세대는 식민성으로부터 벗어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동경하고 자발적으로 포섭돼 살아왔다. 효율성·경제성 등의 신자유주의적 신념에 사로잡혀서 말이다. 동의 여부를 떠나 나는

영화 <동주>를 그렇게 해석·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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