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한국사 ③] ‘불멸의 이순신’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성웅 입체조명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불멸의 이순신’은 KBS에서 2004년 9월 4일부터 2005년 8월 28일까지 이순신(李舜臣)의 삶을 소재로 방영한 드라마다.

원 작가는 김탁환(서울대 국문과 출신, 소설저자)과 ‘이순신 자살설’의 김훈(저자)이란 역사 소설가이나 김탁환이 90% 이상 썼다고 볼 수 있다.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적 사실(FACT)을 생생하게 살리는 데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또한 드라마도 역사적 팩트에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더 할 능력이 없다면 차라리 팩트에 충실한 사극을 제작하는 게 옳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역사적 사실(FACT)의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첫째, 무기에 대한 기본 내용조차 제대로 된 고증을 거치지 않았다. <난중일기>를 보면 활쏘기에 열중하는 이순신의 모습이 자주 나온다. 이순신에게 활쏘기는 군사훈련인 동시에 자기수련의 기본과목이었다. 또 그가 사용했던 활은 국궁이지 양궁이 아니다.

국궁, 양궁 쏘는듯한 자세 등 허술한 고증 논란

그런데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역할을 맡았던 탤런트 김명민은 국궁을 마치 양궁 쏘듯이 했다. 우리나라 양궁 국가대표들이 사대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을 보면, 입술에 댄 화살촉 끝부분과 과녁이 수평방향이다.

그러나 국궁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사수의 화살촉이 과녁보다 10~20도 높게 유지한 채, 화살을 날린다. 탤런트 김명민은 그 단순한 사실조차 지키지 않았다.

또한 조선 수군의 주력화기였던 총통에 대한 오류도 심각했다. 천지현황자 총통을 쏠 때 불이 나고 폭발이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사실 보기에는 좋으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철환(탄환)이 구멍을 뚫거나 기둥을 부러뜨리는 정도의 무기체계였다. 폭발이 일어나는 탄환은 18세기 후반 해전에서부터 나타난다.

아울러 왜군의 무기에 대한 고증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왜군의 최신식 무기는 조총이었다. 그런데 조총이 지금의 M16 소총이나 K-2 소총과 같은 시스템이 아니었다. 현대식 소총은 실탄 속에 화약이 장전되어 있고, 소총의 공이가 탄피 밑부분에 충격을 주면 실탄 내부에 있던 화약이 폭발하면서 총알이 발사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당시 조총은 총구에다 직접 화약을 넣고 그 앞에다 쇠구슬을 장전한 다음, 격발장치로 총구 안의 화약에 충격을 주어야만 쇠구슬이 발사되는 시스템이었다.

만약 화약이 비에 젖을 경우에는 제 아무리 큰 충격을 주더라도 내부폭발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총의 발사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 비오는 날에 조총을 쏘는 장면이 많이 등장했다. 그것 역시 팩트와 거리가 먼 설정이다.

둘째, 명량해전에 대한 비판으로 현재 해전의 지도 위치는 해전이 불가한 곳으로, 난중일기에 보면 진도대교 우측과 양도(洋島) 사이 바다 어귀이다.

그리고 철쇄 가설 여부는 이순신의 기록(일지)과 당대 및 후대의 관련 기록이 전무(全無)하고 진도 벽파진에서 우수영으로 옮긴 다음 날 해전을 했기 때문에 상황상 설치가 불가능하다. 단지 18세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촌로에게 들은 내용을 설화 형식으로 채록(採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셋째, 거북선 참전여부인데, 8월18일 회령포에서 함대 인수 후 계속 서남진했으므로 상황상 불가능하고나에서 김억추에게 지시한 내용을 보면 명량해전에 불참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명량해전 이후 고금도 통제영 시절 거북선을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고, 노량해전에는 참가하였다는 고증이 있다.

넷째, 자살설에 대한 오류로 노량해전은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최대 격전에서 전사한 것인데, 말하자면 ‘면주’(免?, 투구를 벗음)는 갑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투구를 벗는 것으로 극중에서는 작가가 이순신을 자살하려는 것으로 유도하고 있으나, ‘면주’는 목숨 걸고 싸운다는 고사에 나오는 말로 사력을 다해 전투에 임한다는 뜻이다.

또한 선조와 이순신의 갈등을 그리고 있으나 엄연히 임금과 신하 간에는 충성과 의리의 선비정신이 깃들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작가의 갈등 조작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다섯째, 원균과의 관계에서, 이순신(문반 집안)과 원균(무반 집안)은 허균의 책에 보면 건천동에 같이 지냈다고 되어 있으나, 우선 원균이 나이가 5살 위이고 수군절도사인 아버지 원준량을 따라 일찍부터 군관으로 따라다녀 실질적으로 32세에 무관 급제한 이순신보다 10년 위에 위치하여 서로 교우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 선조가 만든 1등 공신인 원균이 용장으로 그려져, 오히려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대신 3살 위인 서해 유성룡과는 형 이요신과 더불어 친숙하게 지냈다.

여섯째, 젊은 시절 갈등을 그리고 있으나,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당시 과거급제 평균 나이는 34세였으므로 평균 이상이었고, 장인인 방진(상주 방씨)의 무남독녀 외딸의 배필이 되었으며, 현충사의 이순신 고택(古宅)도 방진의 집이었으므로 상인, 도공, 엽사(獵師) 등의 행각을 했다는 것은 소설가(시나리오작가)의 상상일 뿐이다.

일곱째, 지나친 정쟁을 묘사하고 있으나 전시체제에서 동인(남과 북)과 서인은 연합정권 즉 거국내각(영의정 유성룡)을 구성하여 서로 협조하는 관계(상황)였고, 전쟁 노선의 차이는 강경파(주전파)인 서인(윤두수)에 비해 남인(유성룡)은 온건파(강화교섭)였으나, 이순신 파직 시 논의 내용을 보면 서인인 윤두수가 원균 편을 들긴 해도, 이순신의 파직을 끝까지 반대한 것을 보면(원균을 경상도, 이순신을 전라도 통제사로 천거함), 주군인 선조의 판단이라고 밖에 불 수 없다.
결국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의 오류가 발생하는 이유는 잘 되면 역사적 사실(FACT)이고, 못 되면 드라마(FICTION)로 적당히 얼버무리기 때문이다.

역사 사실과 혼동주는 지나친 비약은 말아야

또한 드라마 방영시간이 변하면 “400년전의 역사가 30분 당겨진다”라며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표현을 써가며 시청률을 높이려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향후 각종 역사 드라마 제작에 역사학자가 직접 참여해서 고증하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방편일 수가 있다.

끝으로 대하드라마나 TV 드라마의 픽션은 역사적 팩트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과정에서 역사를 재해석하는 상상력이나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더해주는 쪽으로만 활용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드라마와 실재 역사적 사실의 혼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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