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한국사 ⑤] ‘처용가’ 민간신앙 자리잡은 신라 대표 팩션

<동북아역사재단-아시아엔(The AsiaN) 공동기획>

신라 향가 <처용가(處容歌)>. 이 작품만큼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며 후세인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도 드물다. 처용가의 내용은 배경이 되는 처용설화와 함께 고려시대에는 고려가요와 궁중무용으로 계승?발전되고, 조선시대에는 민간신앙으로 자리잡으며 우리 민족의 삶 속에 함께 했다.

처용가 및 처용설화와 관련한 연구논문만 300여편에 달한다. 한국 국문학 연구 사상 단일 대상으로 이렇게 많은 연구 결과를 낳은 작품이 또 있을까 싶다. 처용가는 왜 이렇게 오랫동안 민족의 삶 속에 녹아 생명력을 유지하며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까. 단순한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 거기에다 인간과 인간 삶의 속성을 반영하는 허구를 더한 팩션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미모의 아내를 범하는 역신을 보고 지어 불렀다는 향가 <처용가>. 그 내용을 현대어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삼국유사 ‘헌강왕 5년 산해정령이 춤’ 사실 기록

<삼국유사> 2권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는 이 원문과 함께 다음과 같은 관련 설화가 실려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이에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그의 마음을 잡아두려고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급간(級干) 벼슬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른 뒤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일이 있고나서부터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

<삼국유사>보다 약 140년 앞서는 <삼국사기>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이 설화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기록돼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 49대 헌강왕 5년(서기 879년) 3월 왕이 동쪽 지방을 두루 돌아보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런데 그 모양이 해괴하고 의관(衣冠)도 괴이해서 당시 사람들은 산해정령(山海精靈)이라 하였다.”(古記에는 왕 즉위 원년의 사실로 말하고 있다.)

주(註)가 달린 이 <삼국사기> 기록은 저자가 이미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실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어 그 내용의 신뢰성을 높이고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삼국유사>의 처용설화 내용 및 처용가의 내용이 차이가 많은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처용이란 이름은 없어도, 헌강왕이 방문한 곳이 개운포를 포함한 동쪽 지방이고, 왕 앞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을 춘 인물들이 신라인들이 그때까지 보지 못한 생소한 대상들이라는 데서는 차이가 없다.

<삼국사기>의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삼국유사>의 설화와 처용가가 탄생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민담과 전설 등을 적절히 녹여내면서 설화적 상상력을 더해 가공한 것이다. 이런 처용설화에 등장하는 향가인 처용가 역시 팩션을 산실로 하여 탄생했기에 다양한 해석을 낳으며 큰 인기를 끄는 작품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설화로 우리 민족 삶 속에 녹아들어 생명력 유지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만 해도 귀신 쫓는 신의 인격화설, 인질로 보낸 반중앙적 지방호족의 아들이라는 설, 이슬람 상인설, 불교와 관련되는 인물이라는 설, 무당 몸주라는 설, 풍월도적 미륵신앙을 갖고 있는 화랑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역신에 대해서도 일반적으로 질병을 일으키는 열병신(熱病神)으로 보고 있으나, 타락한 화랑 후예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탐락과 방탕 풍조에 빠져 있던 반도덕적인 패륜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어두움과 악의 화신 등으로 해석되고 있다.
<처용가> 자체에 대해도 ‘무가’ 중의 일부라는 견해, 일종의 진언(眞言)이자 불교적인 주문이라는 견해, 처용신의 유래를 설명한 서사 무가에 삽입된 주술 무가라는 견해, 강자에 의한 아내의 정조 유린이라는 비애를 골계로 표현한 민요적 향가라는 견해, 동해의 용신제의(龍神祭儀)에서 불리던 무가라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처용설화의 처용가가 이렇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시대에 따라 상황과 정신을 담아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힘, 그것은 바로 뛰어난 팩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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