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부국강병’에서 ‘풀 파워’로

‘부국강병’은 원래 중국의 ‘전국책(戰國策)’ 가운데 한 장인 ‘진책(秦策)’에서 처음 나온 말이다. 덕치를 내세운 유가에 맞서 법치를 주장한 법가가 유가의 명분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현실주의적 목표로 내세운 것이 부국강병이다. 춘추시대 관중은 내적으로 부국강병책을 쓰면서도 정치적 표어로는 ‘존왕양이’를 내세웠다. 전국시대 상앙은 변법의 목표로 부국강병을 제시했고, 한비자가 법가의 학통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은 정도전이 부국강병을 명시적으로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조선 후기에는 경세치용(중농)학파와 이용후생(중상)학파 등 실학파가 부국강병책을 주장했고 개화기에도 일본 메이지유신과 중국 양무운동의 영향을 받아 활발한 논의가 이뤄졌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부국강병을 국가목표로 세우게 된 것은 1873년3월 이와쿠라사절단이 세계 순방 중 독일에서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로부터 받은 권고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와쿠라사절단은 우대신 이와쿠라 토모미를 단장으로 ‘유신3걸’의 오쿠보 토시미치와 기도 타카요시,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등 메이지정부 실력자들로 짜였는데 1871∼1873년 이태동안 미국과 유럽 각국을 돌면서 열강과 체결했던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논의하고 그들의 현황을 파악하고 배우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사절단을 초대한 만찬에서 비스마르크는 다음과 같은 스피치를 했다. “세계 국가들은 피차 점잖게 대하는 듯하지만 기실은 허구에 불과합니다. 현실에서는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지요. 프러시아는 과거 약소국이었고, 언제나 이것을 바꾸기를 원했습니다.…?강대국이 약소국과 이견이 있을 때 국제법이 유리하면 이것을 원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힘에 호소합니다. 약소국은 항상 불리한 입장이고, 프러시아가 그랬습니다. 하지만 프러시아는 국민의 애국심에 힘입어 그런 상황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리 예의바르게 처신한다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일본은 얼마 전 프러시아의 입장이기 때문에 양국은 각별한 우의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귀담아 들은 메이지정부의 실력자들은 ‘부국강병’을 국가 목표로 내걸고 구미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낡은 제도를 갈아치우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조국 근대화’ ‘잘 살아보세’ 등의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 내용은 결국 ‘부국강병’이었다. 1972년10월 ‘제2의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메이지유신을 본 따 ‘10월유신’이라 스스로 일컬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일본의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미 클린턴행정부에서 국방부차관보를 역임하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학장을 지낸 조셉 나이(Joseph Nye)는 ‘소프트 파워’ 이론의 창시자다. 그는 한 국가의 힘을 군사·경제력 중심의 ‘하드 파워’와 문화·외교·역사 중심의 ‘소프트 파워’로 나누고, 외교정책은 하드 파워 일변도가 아니라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의 결합인 ‘스마트 파워’로 행해져야 한다고 갈파했다. 오바마행정부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스마트파워’의 신봉자로 과거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unilateralism)’를 배격함으로써 국제적인 호응을 받았다.

나이의 이론에 따르면 파워는 한쪽이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다른 쪽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말한다. 주권국가의 하드 파워가 ‘국력’을 말한다면 소프트 파워는 ‘국격’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드 파워가 ‘패도’ 추구라면 소프트 파워는 ‘왕도’ 사상과 의미가 통한다. 소프트 파워란 개념은 설득의 수단으로 강압과 힘의 행사, 매수 등의 방법을 지양하고 매력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소프트 파워의 주요 통화(primary currencies)는 가치와 문화, 정책과 제도 등이고, 이들 통화가 다른 나라 사람들을 끌어당기는가, 아니면 밀어 내쫓는가에 따라 힘이 좌우된다는 것이 나이의 지적이다.

소프트 파워의 관점에서 한 나라의 힘을 재는 궁극적 잣대는 매력(charm power)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국가와 국민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비치는가는 단순히 그 나라 정부의 정책이나 행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정부와 민간을 포괄할 뿐 아니라 공공이미지와 국제적 평판, 직간접적인 인적 교류, 언론보도와 인터넷 콘텐츠, 문화상품과 상업제품 등이 모두 한 나라의 매력을 결정짓는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전부 다일까? 현대는 개인의 경제적 부와 학식, 경력, 자격에 못지않게 평판이 주요한 가치이자 소유·거래물인 시대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국내총생산(GDP)과 군사력, 삶의 질 지표 외에 국제적 평판이 중요하다. 그런데 세계 속의 한 나라 평판은 하드 파워는 물론 소프트 파워만으로도 판가름이 나지 않는다. 어떤 비평가는 저스트 파워(just power)라고 해서 국제 사회의 정의라는 개념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이어야 할 인권에 대한 인식도 나라 사이의 문화와 종교, 이념 등의 차이 때문에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는 경우를 왕왕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스트 파워는 자칫 ‘강자의 정의’로 축소·귀결될 우려를 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넘어서는 풀 파워(pull power)를 상정해 볼 수 있다. 풀 파워는 푸시 파워(push power)와 대립되는 개념이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charm power)과도 다르다. 푸시 파워는 강요든 협박이든 매수든 설득이든 주로 군사력과 경제력, 외교력을 동원해 의지를 관철하는 것이다. 또 매력은 스스로의 이미지와 실체를 긍정적으로 비쳐지도록 해서 상대를 원하는 방향으로 유인하는 힘이다. 따라서 매력은 적극적 행동보다는 자신을 다듬고 추파를 보내는 등의 소극적 행태를 주로 수반한다.

풀 파워는 이와 달리 다른 나라에 대해 적극적 행동을 한다. 그 내용은 가까이 다가서고, 참을성으로 대화를 하고, 마음을 열고, 도움의 손을 내밀고, 베풀어주고, 생색을 내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는 것이다. 특히 심적, 물적 지원을 베풀면서 대가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를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상대방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드 파워가 신체적으로, 또는 돈의 위력으로 밀어붙이는 것이고 소프트 파워는 교언영색으로 마음을 사는 것이라면, 풀 파워는 상호 존중과 배려의 바탕 위에서 이쪽에서 다가가 베풀면서 상대가 마음을 열고 손을 뻗도록 하는 힘이다.

지극히 원론적이지만 예수의 산상수훈 가운데 황금률과 공자의 가르침은 형태가 다를 뿐 뜻이 일치한다. ‘너희가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또는 ‘섬김을 받고 싶은 자는 남을 먼저 섬기라’는 예수의 말씀이나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는 공자의 말씀은 보편적 윤리종교의 열쇠말이 됐다. 앞으로 한 나라의 힘은 다른 나라에게 돕고, 선의로 대하고, 배려할 줄 아는 데서 나올 것이다.

한국은 K-Pop 등의 한류를 진작하는 데도 애써야겠지만 더욱 바람직하게는 남에게 주고, 베풀고, 돌보고, 보살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서 으뜸가는 나라는 힘센 나라나 매력 있는 나라보다 남을 진심으로 감복하게 만드는 나라다. 그리고 남들을 존경하지 않는 나라는 그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없는 것이 상호성의 철칙이다. 한국은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가 균형 잡힌 스마트 파워를 넘어서 풀 파워까지 고루 갖춘 나라가 돼야 한다. 이것은 20세기 관념에 바탕을 둔 도덕주의적 권고가 아니라 21세기의 시대정신을 감안한 실용주의적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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