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일본의 ‘거대전략’과 한반도의 진로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가 6월3일자에 상당히 흥미로운 글을 게재했다. 미 해군분석센터 선임고문인 제임스 클래드(James Clad)와 어틀랜틱카운슬의 펠로우인 로버트 매닝(Robert Manning)이 공동 집필한 이 기고문은 일본이 독도를 한국에 돌려주라고 제안하고 있다. 독도는 이미 한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반환하라는 것은 부정확한 표현이고, 아마 일본에게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고 한국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권고라고 해석된다.

미국은 그동안 한일 간의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에 대해 중립을 지켜왔고, 현재도 그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 정부·민간을 떠나서 일본에게 독도를 한국에 넘겨주라고 공개 제안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고 이번 기고문은 소소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주장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물론 클래드와 매닝은 미 정부의 주요 공직자가 아니고, 문제의 기고문이 미국의 입장을 직접 반영한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필자가 미 정부기관과 정부와 밀접히 연계된 민간 싱크탱크에 각각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눈여겨 볼 만하다. 미 정부기관 재직자는 보통 외부 기고, 특히 외국 언론에 기고할 때 상부 허가를 받아야 하고, 글 내용에 관해서도 정부 정책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허용 받는 것이 관례다. 따라서 이번 기고문은 일본에 지적 자극을 주고 한국에게는 환심을 얻으려는 미국 일각의 비공식 제스처라고 볼 여지는 있다.

한국 정부가 7월 초 한국 공군 차기 전투기를 구입하는 FX-3사업의 기종을 선정할 예정이기 때문에 경쟁국인 미국과 영국·스페인·독일이 앞다퉈 우호적인 제스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국이 올 가을에 박근혜 대통령이 국빈방문하도록 초청하고 공식 발표를 6월 초로 앞당긴 것이나 미국이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반환 후에 한미연합전구사령부 또는 한미합동사령부를 만들어 주한미군이 한국군 장성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는 한국 쪽 보도를 부인하지 않고 있는 것은 모두 8조3천억원 규모의 FX-3 기종선정과 무관치 않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FT> 기고문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다소 과잉해석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정부의 공식 견해가 아닐뿐더러 일본 정부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이처럼 과감한 제안을 수용할 가능성도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미국은 일본에 대해 아베정권의 우경화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고, 한국에 대해서도 일본과 관계를 개선해서 정보보호협정과 군수지원협정을 체결해서 한미일 삼각방위체제를 굳히자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 또한 명백하다.

여기서 <FT> 기고문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아베 신조가 노벨 평화상을 받는 법(How Shinzo Abe could win the Nobel Peace Prize)’이라는 ’미끼성‘ 제목을 단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베 총리의 태평양 지역에 내셔널리즘의 망령들을 다시 불러내고 있고 과거 일본의 역사적 행위에 대한 수정주의적 태도를 보여 주변국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부 자국 학자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18세기 일본 지도들조차 독도는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작은 섬 독도는 일본의 경제·정치·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대신 지정학적인 골칫거리일 뿐이다. 아베 총리가 독도를 포기하는 대담한 행보를 취한다면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이나 닉슨의 중국 방문처럼 일본의 평판을 극적으로 개선하고 지역을 긍정적으로 완전히 탈바꿈할 수 있으며 유력한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기할 만한 점은 미국인 필자들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중국의 센가쿠/댜오위다오 요구나 러시아의 북방영토 점령에 대한 일본의 반론보다 훨씬 더 취약하고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독도는 한국인들에게 ‘감정적 쟁점’인 데 반해 일본인들에게는 타케시마가 센카쿠열도나 북방영토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필자들은 일본의 독도 포기를 공론화하면서 이런 “대담한 조처”는 “의심할 여지없는 우호적 행동(unimpeachable act of good will)”으로서 엄청난 “충격효과(shock value)”를 불러일으킬 “웅원한 몸짓(grand gesture)”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일본이 이런 제안에 귀를 기울일 가능성이 낮다. 그러나 기고문이 말하는 ‘웅원한 몸짓’은 실제로 일본의 ‘거대전략(grand strategy)’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이 중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책으로 미일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고 태평양 도서국가와 동남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양면책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미일동맹 강화와 태평양 호상(弧狀) 연대로는 대륙에 대한 교두보이자 전진기지인 한국을 제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미동맹의 가치와 한국의 국력 상승, 나아가 통일한국의 가능성까지 감안하면 일본이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할 경우 한미일 삼각편대의 위력을 반감시키게 된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한일 간의 현안인 독도영유권과 종군위안부, 야스쿠니신사 참배 등 역사인식, 동해의 명칭문제 등을 두 나라 사이에 가능한 한 유연하게 타결하도록 권하고 싶을 것이다. 대부분 명분상 문제인 이들 현안 외에도 한일 간의 무역불균형,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일본 극우세력의 망언폭거 등은 제3국인 미국이 개입하기는 어려운 실질 문제들이 즐비하다.

일본의 거대전략은 황준헌의 ‘조선책략’과 일면 유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공과 함께 대두하던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려면 ‘결일(結日), 친중(親中), 연미(聯美)’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떠오르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결맹하고, 한국과 연대하고, 호주·인도·동남아국가들과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당장 일본의 한국과의 연대가 쉽지 않고, 통일한국과의 연대는 더욱 요원하다는 것이다.

한국 쪽의 거부감보다 심각한 것은 일본이 스스로 움츠러들고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듯하다는 점이다. 일본은 그동안 미국과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평화애호 이미지와 깍듯한 예의, 청결과 배려, 고도기술의 수출품 등으로 호의적 평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경기 침체와 인구 고령화, 중국과의 분쟁, 한국의 추월기세, 과거사 부정과 정치사회적 보수화 등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추락과 위기의식의 심화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또 이런 문제에 대한 일본의 대응은 개방적 사고와 이웃에 대한 포용전략이 아니라 우경화와 미국에의 의존 심화의 부정적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도 일본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일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되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다진다는 것이 종래의 기본전략이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출범과 함께 한미동맹의 바탕 위에 중국과의 관계를 대미관계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옳은 방향이지만 일본에 필요 이상으로 등을 돌리고, 러시아를 부질없이 낮춰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결정적 허점을 안고 있다. 중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과거 일본 편에 섰다가 갑자기 중국 쪽으로 말을 갈아타는 듯 보이고 러시아의 존재는 아예 무시하는 것처럼 비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주변 4대 강국과 북한에 대해 어떤 ‘일대계획(grand scheme)’을 세워야 할까. 한국은 일본을 끌어주고 중국을 밀어주며, 러시아는 받쳐줘야 하고 미국과는 최대한 같은 편이 돼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 북한에 ‘거부할 수 없는 제의’를 해야 한다.

먼저, 일본에 가서 제의를 한다. ‘일본은 독도와 센카쿠열도, 북방영토 일부를 포기하라. 과거사에 대해서도 흔연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위안부 등과 관련 성실하게 배상한다. 동해/일본해는 창해(滄海, Blue Sea) 등 중립적 명칭으로 바꾼다. 한국은 종군위안부 문제와 야스쿠니 참배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는다. 일본이 이처럼 180° 돌아선다면 일본이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도록 한국이 앞장서서 알선하고 설득해준다. 단, 한국이 북한과 통일하거나 외교대표권을 단일화하기로 합의할 경우 일본이 한국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적극 지원한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면 중국에 간다.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포기한 이상 중국은 중일대립을 지양하고 일본의 안보리 진출을 지원하라. 한중일 FTA와 어업협정도 조속 체결하고 3국간 공동통화 등 경제공동체를 추진한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대만과 티베트 주권을 지지한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고 한국은 통일 후 미군의 북한주둔을 배제한다.“

중국 다음은 러시아다. ‘일본은 북방영토 4개 섬 가운데 2개 섬만 돌려받는 대신 평화협정을 맺고 러시아를 경제 지원한다. 러시아는 일본과 통일한국의 안보리 진출을 지지한다. 이때 브라질과 인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국가를 추가해 안보리 상임국가를 12개국 정도로 확대한다. 러시아는 한국과 일본의 자본으로 석유·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공급한다. 한국은 연해주와 사할린 개발을 위한 경제협력협정을 맺고 공동 개발한다.’

미국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긴밀하게 상의하고 협조하지만 재차 확인한다. ‘미국은 중국과 전면 대결이 아니라 경쟁적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유익한데 한국과 일본이 나서서 한중일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중국을 1차적으로 일정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전방면의 동맹관계를 유지할 것이며 미국은 동아시아의 긴장관계나 군사대결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을 유엔 안보리에 동참시킴으로써 절대다수의 우호 표를 확보할 수 있다. 한중일 3국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원하고 중동지역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북한에 간다. ‘북한의 안전과 체제를 일정 기간 보장해 준다. 군대도 유지하도록 허용한다. 핵무기도 필요하다면 불사용 보장과 국제적 감시를 조건으로 일정 수량 보유토록 인정하고, 핵보유국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 한국은 식량은 물론 전력·도로·철도 등 인프라 건설과 경공업 발전을 위해 전폭적 지원을 한다. 남북한과 미중 등 4국간 평화협정을 맺고, 일본의 강점 배상 200억 달러를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공여한다. 북한은 평화협정과 함께 한국과 불가침조약 등 공격성 전쟁을 포기하는 선언을 한다. 북한은 대한민국과 단계적 통일방안을 받아들이고 우선 남북국가연합에 외교권만 넘겨 유엔 안보리에 진출할 수 있도록 협조한다.’

이상은 남북한을 포함한 동북아의 잠재적, 현재적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포괄적 해결’ 방안이다. 당사국들에 쉽사리 받아들여지거나 한꺼번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이 무엇을 갖고 있는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다루기 힘든 북한을 상대하려면 탄탄한 경제, 튼튼한 사회, 굳센 무장력, 든든한 동맹, 친근한 이웃, 활기찬 민주체제와 더불어 설득력 있는 아이디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외교를 잘 하려면 우선 누가 들어도 말이 되는 정책과 제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일대계획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우리 내부에서도 이념성향과 정세판단에 따라 반대와 이견이 많을 수도 있다. 또 당사국들 가운데 어느 나라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중국 진나라의 위협에 대한 소진의 합종이나 장의의 연횡과 같은 천하대계를 우리 나름대로 제시할 수 없다면, 또 냉전시대에는 진영에 예속되어 독자적 입장과 전략이 없고 권력이동시대에는 강국의 눈치나 보며 민족 내분을 극복할 수 없다면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업다.

구한말 사대파와 개화파, 친일파와 친러파로 갈려 내부 분열과 투쟁에 시달린 것을 기억하면 21세기에는 우리 안에서 친미파와 친중파로 나뉘어 서로 맞서는 어리석음만은 피해야 한다. 친미세력과 종북세력 운운하며 서로를 공격하는 분열 책동은 그만 두고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이 대표하는 한민족의 입장에서 우리의 이니셔티브를 내놓을 때가 됐다. 안 받아주면 어떤가, 우리에겐 꿈이 있고 구체적인 해결안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이 자기네 안을 내놓으면 된다. 아니면 입을 다물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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