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국가지도자의 비주얼

박근혜 대통령이 4일 오후 열린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서 현판 제막을 마친 뒤 숭례문을 나서고 있다. <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이 최근 광채가 나는 듯 보인다. 지난해 내내 선거운동에 시달리고 대통령 당선 후에도 새 정부 출범을 위한 인사와 정책개발 등 국정운영 준비에 골머리를 썩이다가 이제 가까스로 일단락 짓고 그나마 한숨 돌릴 여유를 찾은 까닭이 아닌가 싶다.

5월1일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첫 무역투자진흥회의가 열렸다. 보도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참석자들의 건의를 듣고 질문을 하는가 하면 관계관들에게 시정 지시도 내렸다. 그런데 KBS-TV 9시뉴스에서는 박 대통령이 줄곧 말하는 모습만 나왔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 채 밑을 내려다보고 읽는 것이 아마 미리 준비된 ‘말씀자료’ 에 따라 인사말을 하는 장면이 아닌가 싶었다.

‘재스민 혁명’이라 불리던 2011년 튀니지항쟁이 일어나기 몇 해 전 튀니지 수도 튀니스를 간 적이 있었다. 카르타고 유적도 볼 겸 터키와 함께 세속주의가 강한 이슬람국가란 이미지가 맘에 들어 혹시 괜찮은 곳인지 살펴보려는 뜻이었는데 별로였다. 도심 곳곳에 기관단총을 든 군인들이 서있어 삼엄한 분위기에다 그들에게 길을 물었더니 프랑스어로만 응답하는 것이었다. 호텔 방의 TV에서는 24년간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이 계속 비쳐졌는데 오디오는 없고 회의 석상에서 무언가 끝없이 지적하고 교시하고 있었다.

1980년대 ‘땡전 뉴스’처럼 국가지도자가 매일 밤 TV뉴스 첫머리에 나오는 것이 후진국의 특징이다. 이에 버금가는 징표는 지도자가 말하는 장면이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때 목소리는 반드시 지워지는데 그 이유는 말하는 내용이 시시하고 지엽적이라 온 국민이 들으면 실망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TV에서는 대통령이 말하는 모습은 기자회견이나 외부 행사 등에서 정식으로 스피치 했던 부분을 뽑아 내보낸다. 설사 헬리콥터에서 내려 이동하는 도중에 기자가 소리쳐 질문한 것을 받아 짧게 한마디 했을 때도 대부분 말 내용을 함께 내보내지 입만 달싹이는 대통령은 TV에 거의 비치지 않는다.

2011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을 때 일요일 오후 대통령궁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이라고 했더니 긴 줄의 맨 앞으로 보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단순히 대통령궁을 둘러보는 정도가 아니라 누구나 대통령 집무실까지 들어가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미국 백악관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현지 사람에게 물어보니 남미 국가들 간에 대통령궁을 공개하는 정치적 제스처가 일종의 경쟁이라고 했다. 그렇다 해도 국민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몸짓은 의도를 떠나 좋아보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할 때는 내용을 확실히 정해서 정식으로 하고, 국민이 모두 들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은 TV에 내보지 말았으면 한다. 또 회의 등에서 입만 달싹이며 지시하고 명령하는 모습은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느낌만 줄 뿐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대통령은 온갖 건의와 탄원, 의견과 제안, 비판과 항의를 묵묵히 경청하는 모습이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정치인으로서 신중하고 과묵한 이미지를 잘 가꿔왔는데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자제심을 잠깐 놓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홍보수석실 등 참모진이 바디 랭귀지와 비언어적 메시지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듯하다는 점이다.

5월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 나타난 박근혜 대통령은 단아했다. 노란 저고리에 짙푸른 감색 치마를 받쳐 입은 품이 육영수 여사를 연상시켰다. 특히 기념사를 할 때는 앞서 말했듯이 얼굴이 훤하게 빛나는 것이 꽃이 핀 것처럼 절정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데 기념식 행사가 영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첫째, 행사가 너무 길고 산만했다. 숭례문 복구는 우선 그리 기뻐하고 날 뛸 일이 전혀 아니다. 2008년 2월 남대문이 불 탈 때 나는 미국에 있었는데 TV 현장중계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우리 역사가 아로새겨진 문화유적이 불타는 것에 대한 슬픔과 함께 방화범은 물론 국보를 내팽개쳐 둔 관료들에 대한 분노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문화재청장은 극단적 방법으로라도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무릎팍도사’라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찧고 까부는 것을 보면서 혐오스러운 생각이 더 짙어졌다.

둘째, 복구 기념식은 장중하고 단순했어야 한다. 이날 행사는 600년 역사의 숭례문을 우리 대에 와서 6·25와 2008년 방화사건으로 두 차례나 태워먹은 죄를 뉘우치고 선조에게 용서를 구하는 의식이지, 복구라는 이름으로 호도한 낙성 경축식일 수는 없었다. 의식은 가장 단출하게, 가령 선조에게 고유문을 읽고 개문식을 하는 것으로 족했다.

돌단풍을 심고, ‘희망보감’ 전달이라는 것은 군더더기에 불과할 뿐 아니라 보기에 깔끔하지도 않았다. 파키스탄·스리랑카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을 앞세운 것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된 잘못은 식견이 짧은 청와대 참모진과 문화부·문화재청 관료들의 수준 탓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이벤트회사의 얄팍한 기획에 의존하는 작금의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째, 박 대통령은 이날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나왔는데 “전통문화유산의 보존·계승이 중요하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취임식 때 한복을 두 번이나 갈아입은 것은 전통문화와 무슨 상관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건 이왕 한복을 입을 것이었으면 여름 두루마기까지 갖춰 입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개량한복은 말할 나위 없고 마고자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예법에 어긋난다면 예식에서는 좀 더 정중한 차림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이번 주 박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고 있다. 어쩌면 이승만 대통령의 1954년 방미 이래 가장 주목 받는 방문이 될 수도 있다. 최근 북한의 협박으로 한국문제가 미국 조야의 관심을 끈 데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박정희 딸’로서의 후광 때문이다. 미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한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도 들리는데 내 생각으로는 그냥 평상복이 어떨까 싶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터키의 천문학자처럼 옷차림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지는 일이 혹시라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1980년 전두환 대통령을 따라갔던 이순자 여사가 궁중 복식인 ‘당의’를 입었다가 구설수에 오른 전철을 밟아서도 좋을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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