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6·25전쟁의 기원
6·25전쟁 발발 63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에 미국 시카고대 역사학과 과장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인터뷰가 실렸다. 커밍스는 “1950년 6월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이며, 미국이 의도적으로 유도하지도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이 신문은 전했다.
커밍스는 인터뷰에서 “나는 남침 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나는 수정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한 적도 없다”면서 “전두환 정권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1985년부터 그렇게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커밍스는 특히 “1949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3·8선 부근에서 남한이 많은 도발을 했고 그해 8월 옹진, 개성, 철원 등지에서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격화됐다”면서 “한국전쟁의 발발에는 미국과 남한도 큰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권을 읽은 것은 1981년 미국에 머물던 때였다. 명저의 반열에 오를 만한 역작이었다. 커밍스는 몰성찰적인 전통주의 시각에 대해 역사학자로서 처음으로 진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1950년 6월25일 하루아침에 전쟁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인식과 관념의 허구성’이었다. “전쟁의 뿌리는 일제 강점기와 1945년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었고, 이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은 국제대리전이기에 앞서 내전이었다”고 지적하고, “미국과 소련은 각각 6·25 이전 남한과 북한의 공격욕구를 억제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커밍스는1980년대 학자로서의 양심과 학문적 성실성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특히 진보적 지식인의 구미에 맞도록 결론을 모호하게 내리면서도 뚜렷한 시사점과 방향성을 남김으로써 미국 학계는 물론 한국 지식사회에서 강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1990년에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특히 남침 유도설을 포함한 수정주의적 시각을 꽤 설득력 있게 내놓은 것으로 평가 받았다.
브루스 커밍스의 가설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의미 있는 시각이고 그의 노작은 존중받아 마땅한 학문적 성취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6·25가 혁명세력과 친일세력의 대결이라는 성격 규정과 전쟁의 주된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결론은 크게 보아 오도된 생각이었다.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련-중공-북한의 수직적 지령체계를 과소평가했고,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좌고우면하다가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제 스스로 넘어진 격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두환 정권 탓을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1993년 1월 소련 기록보관소에서 한국전 관련 기밀문서가 발견되면서 스탈린이 전면전을 직접 승인했다는 사실증거에 의해 6·25 내전설은 상당 부분 반증되고 말았다. 사실 거의 같은 내용의 증언이 1970년 서방에서 발간된 후르시초프 회고록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이런 점에서 커밍스는 전쟁 이전 남북한의 자잘한 사건과 증거들을 끌어 모아 사실(寫實)주의적인 전쟁 모자이크화를 그려냈지만 정작 중요한 진실의 큰 얼개를 간과했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다.
커밍스의 논법을 무리하게 확대 적용하면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은 카리브해의 소국 그레나다의 경솔한 행동과 쿠바의 부당한 그레나다 개입, 소련의 미국 세력권 침탈 등의 탓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레나다 침공은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미국이 세 살짜리 애기의 팔을 비튼 꼴’의 제국주의 망동이었고, 영국과 캐나다마저 유엔총회의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난에 가세했다. 마찬가지로, 남한이 북한의 침공을 자극 또는 유도했다는 주장은 대단히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고 미국의 음모설도 근거가 매우 박약하다.
6·25전쟁의 기원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당시의 세계정세를 소련의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 2차대전의 종전과 함께 소련이 동유럽을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자 미국은 미소협력체제를 파기하고 1947년 무렵부터 소련과의 냉전에 돌입했다.
동북아시아에서도 1946년 3월부터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열려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10월18일 미국의 휴회 제안과 10월21일 소련대표단 철수로 해산되고 말았다. 유럽에서는 소련이 1948년 6월 미영불소 등 4개국 공동관할구역인 베를린으로 가는 육상통로를 봉쇄함에 따라 야기된 베를린 위기가 1949년 5월까지 지속됐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의 핵무기 대응 개발이었다. 1938년 독일에서 핵분열이 발견된 이래 미국은 맨해튼계획을 비밀리에 수행, 최초로 핵폭발에 성공했고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실감한 소련은 이전의 소규모 핵 개발계획을 몇 곱절로 늘려 핵폭발 실험에 총력을 기울였다. 나치 독일의 핵개발 인력 및 정보와 미국과 영국의 이른바 ‘원자스파이’들이 보내온 첩보의 도움을 받아 소련 연구진은 1949년 8월29일 첫 핵실험에 성공했다.
1945년 8월부터 1949년 8월까지의 기간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의 시대였고, 소련은 나치 독일군을 궤멸시킨 적군(赤軍)의 막강한 지상전력에도 불구하고 미국 원자탄의 위력 앞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베를린 봉쇄 당시 미국이 수송기를 총동원, 생필품 공수작전을 펼쳐도 수수방관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1949년 8월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 순간 미국의 핵 독점체제는 깨어지고 만의 하나 미소 간의 제3차 세계대전이 터져도 소련은 승리를 기약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스탈린은 그러나 유럽에서 미국을 직접 도발하는 방도를 회피하고 아시아의 한반도를 미국의 의지를 시험하는 전장으로 택했다. 유럽에서 군사충돌이 일어날 경우 곧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고, 독일과 동유럽 국가들, 소련은 불과 5년 전에 2차대전의 참화를 입은 터여서 아직 회복이 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울러 스탈린은 전쟁을 벌이지 못해 안달인 김일성의 조선인민군에게 대리전을 먼저 수행토록 하고 만의 하나 미군이 참전할 경우에는 이제 막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지원을 맡겨 소련군의 직접 참전을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기밀 해제된 소련 기록보관소의 문서를 바탕으로 러시아 외무성 산하 연구소의 역사학자 예브게니 바자노프 교수가 1995년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김일성 수상이 소련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에게 북한의 남한 침공 재가를 요청한 것이 1949년 3월7일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현재 전 조선을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 상황이 조성됐다”고 말했으나 스탈린은 북한군의 군사적 취약성, 3·8선 유지에 대한 미·소협정의 존재, 미군 개입의 가능성을 들어 이 제안을 각하했다. 스탈린은 다만 “적군이 공격해 올 경우 북조선이 반격을 가함으로써 군사적 통일을 기할 수 있다”면서 “그럴 경우엔 누구나 북조선을 이해하고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는 소련의 1차 핵실험 이전이었다.
1949년 8월과 9월, 북한은 박헌영 외상 등을 보내 전면적 남한 침공을 허가해 달라고 재차 요청했다. 앞서 6월29일 미국은 주한미군을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전원 철수시켰다. 그리고 8월29일 소련의 1차 핵실험이 드디어 성공했다.
스탈린은 종전의 입장을 선회, 9월11일 주평양 소련대사에게 남침 공격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국제적 측면의 검토를 하라고 지시했다. 주북한 대사관이 9월14일 부정적 결론의 검토보고서를 보내온 다음,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9월24일 북한군 군사태세가 덜 준비됐으며, 북한군의 선제공격은 미국에 한국에 대한 개입 구실을 제공할 것이라는 이유로 전쟁 개시에 반대하는 결정을 내렸다.
김일성은 1950년 1월 스티코프 평양주재대사에게 개전 필요성을 역설하며 스탈린에게 직소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다시 방문토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요청을 전달받은 스탈린은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초정했고, 김일성은 4월 한 달 대부분을 모스크바에서 지내며 스탈린과 전쟁계획을 논의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개전 요청을 승인했는데 이에 대한 두 사람의 대화를 기록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자 증언 등 2차 자료를 종합한 결과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첫째 국공내전에서 공산당 승리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둘째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획득, 셋째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과 미소관계 악화, 넷째 미국의 아시아 방위의지의 약화 신호 등이었다.
스탈린은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 개전계획을 사전 통보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오가 대만 침공을 소련이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스탈린이 이미 거절했기 때문에 중공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논의하기 어려웠다는 이유 외에 스탈린이 자신의 전략지휘력을 과시하고 만약의 경우 마오에게 한반도의 전면전을 기성사실화한 다음 참전을 요구할 의도였다는 것이다.
후일 미국·대한민국과 북한·중공이 정전회담을 진행하던 1952년 8월20일 전쟁에 지친 김일성이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를 통해 스탈린에게 휴전에 동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는 것이 유럽 등지에서 소련에 유리할 것이라는 이유로 휴전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 3월5일 급사한 뒤에야 휴전협상이 본궤도에 올랐고 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그 다음은 우리가 아는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