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전쟁의 말’과 전쟁

성경에 “전쟁과 전쟁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태24장4절)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전쟁이 나기 전에 반드시 ‘전쟁의 말’이 떠돈다”는 풀이가 관심을 끈다.

지난 7일 유엔 안보리가 북한 제3차 핵실험에 대한 제재결의안을 통과시킨 후 북한은 ‘전쟁의 말’을 거듭 쏟아 내고 있다. 북한이 호전적 발언을 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53년 휴전 이후 태어난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전쟁은 겪어보지 못했어도 북한의 전쟁 위협과 도발행위는 평생 듣고 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웬만한 북한의 협박언동에는 만성이 돼서 꿈적도 않고, 귓등으로 흘리기가 예사다.

그런데 최근 북한의 전쟁의 말은 도를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에서도 선을 넘고 있다. 지난 2010년 연평도 포격사건에서 북한군이 군사목표와 민간구역이 섞여있는 곳을 무차별 포격해 민간인사망자 2명 중경상자 3명을 낸 것은 휴전 이래 처음 있는 일로서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북한은 조평통 이름으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지극히 유감”이라며 건성으로 사과를 했지만, 지난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한 이후 2010년 또다시 ‘서울 불바다’ 협박을 들먹였다. 이후 북한은 2012년4월 인민군 최고사령부 명의로 “서울의 모든 것을 날려 보낼 수 있는 특별행동조치”를 엄포했고, 올해 3차 핵실험 이후인 이달 6일 <로동신문> 1면은 “정밀 핵 수단으로 서울만 아니라 워싱턴까지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제 상습 협박이 된 것이다.

전쟁에서 민간인 사상자가 나는 것은 흔한 일이고 보통은 군사목표를 공격하다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변명하며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진실을 가린다. 그러나 민간인 또는 민간목표를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이고, 그런 예고나 협박을 하는 것 또한 ‘반인륜범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북한은 이제 전쟁 위협만으로는 충분한 자극을 줄 수 없다고 느낀 나머지 발언의 수위를 계속 높이다 이제는 서울 포격과 핵무기 사용 등 민간인 학살을 예사롭게 협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개구리를 물 속에 넣고 물 온도가 1도씩 올라가도록 천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영문도 모른 채 수영하다 어느 순간 죽는다고 한다. 우리도 북한의 호전적 수사에 익숙한 나머지 일종의 불감증이 생겨서 현실을 외면한 채 안일함에 빠져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실험과 지난 2월 제3차 핵실험은 북한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기상신호’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분단체제를 유지한 채 북한 핵을 방치하면 ‘머리에 폭탄을 얹은 격’이고 ‘눈썹에 불이 붙은 격’이라 견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북한은 원래 휴전회담 당시부터 미국과 설전을 벌여왔다. 미국에 대한 협박과 도발은 항다반사였다. 따라서 미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의 이런 특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일반 대중은 상당히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뉴욕 맨해튼 마천루의 유리창 한 장 깨진 적이 없다‘는 말처럼 미국 본토와 미국인들에 대한 협박에 익숙하지 않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도쿄 대공습’에서 ‘전략 폭격’이란 이름으로 소이탄으로 하루에 12만 명을 죽이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전쟁을 끝낸다’는 명분으로 핵폭탄을 투하했지만 자신들에 대한 공격은 상상조차 꺼리는 경향을 보여왔다.

과거 미국은 나치독일과 일본제국, 소련, 중공, 북한과 베트남 등 온갖 나라와 싸우거나 맞서왔다. 최근에는 사담 후세인과 카다피 등을 악당으로 몰아 결국 쓸어버렸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이나 카다피는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일이 없다. 이란의 경우 강경파 이슬람성직자들이 불을 뿜는 반미 설교를 하고 정부도 미국을 ‘그레이트 사탄’이라고 부르지만 워싱턴을 공격하겠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는다.

미국인들이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해 갖는 증오심을 보더라도 그들의 인내심과 관용이 얼마나 짧은가를 알 수 있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에게는 물리적, 심리적 거리가 멀고 약간은 초현실적으로까지 비쳐지는 적수였다. 그런데 북한이 몇 년 뒤 ICBM을 갖게 된다는 전망이 나온 다음에는 지극히 현실적인 위협으로 보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 엄청나게 위협적인 언어와 도발적 제스처로 미국 여론을 자극하고 있다. 영어 속담에 ‘Add insult to injury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 설상가상)’란 말이 있다. 북한은 지금 이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은 주류 백인사회와 별도로 그들만의 하위문화를 형성, 독특한 습성과 관행, 언어를 갖고 있다. 특히 젊은 남성들은 슬랭을 구사하면서 서로 ‘죽인다’는 말을 농담 삼아 입에 담는 경우가 많다. 흑인 청소년들이 살인 혐의 등으로 법정에 설 때 ‘죽인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이 불리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더러?있다.?백인 배심원들은 흑인들의 언어문화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빚어지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오랫동안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탓인지 상투적으로 협박과 도발을 일삼지만 세계의 일반 대중은 북한을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은 왜 이렇게 막가는 것일까. 북한이 한국과 경쟁하고 미국의 압력에 맞서 생존하려 싸우는 것을 최대한 이해한다 치더라도 세련된 행태는커녕 핵실험을 한 뒤에 현실성도 없는 협박을 마구잡이로 내쏘는 것은 왜일까.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북한이 이른바 ‘벼랑끝 전술’로 재미를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한국의 50-60대 남자들의 옹고집, 막무가내 ‘꼰대’기질과 비슷한 특질이 북한 지배층의 정서와 문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과거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는 젊은 나이였지만 18세 이후 항일 빨치산 활동으로 고난을 겪어본 사람이었다. 김정은은 이제 30세 미만의 나이로 북한을 떠맡았는데 빨치산은커녕 스위스유학과 지도자수습이 유이한 경력이다. 게다가 그의 서구사회와의 접촉은 상당히 어설픈 것이라서 영어와 독일어는 어느 정도 배웠을지 몰라도 서구문화의 핵심을 터득했기를 기대하기는 난망이다. 만약 김정은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서구문화를 잘 체득했다면 지금의 막가파식 협박은 자제하고 좀 더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김정은 주위에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데 있다. 김영남 등 고위인사도 김씨 왕조와 상관없는 ‘고용사장’이라 영향력이 없고 군부 대표자 격인 리영호가 철직된 것을 보면 군부도 그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듯하다. 오직 장성택·김경희 부부가 김정은을 견제할 가능성이 있는 듯한데 그들은 원활한 승계와 내부의 단속에 주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북한 지도부는 장거리로켓 발사와 핵실험 성공을 한껏 고무돼 있고 현재의 기세를 살려 밀고 나가야 한다는 합의가 있는 듯하다.

‘잘 나갈 때 조심하라’고 했던가? 북한은 지금 대단히 조심해야 할 때인데 지나치게 밀어붙이고 있다. 물론 중국이 유엔안보리 제재에 동참하는 등 압력을 가하는 데 반발하는 측면도 있고, 미국을 밀어붙이면 언젠가 대화국면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예측도 과거 경험에 비추어 틀렸다고 일소에 부칠 수 없다. 그러나 북한은 알아야 한다. 제3차 핵실험에 제한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북한과 다른 관련 국가들은 전혀 새로운 게임을 하게 됐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은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분단체제가 영구화 되는 것을 용인하기 어렵다. 한국이 내부 문제를 풀어가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에 시달리고 중국과 미국·일본 사이에 끼여 구차한 신세를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도 북한이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핵 수단을 갖게 되면 국내 여론에 밀리게 된다. 중국과 협력하든 군사적으로 공격하든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라는 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베트남의 선례 때문에 북한을 견제할 수밖에 없고 핵보유를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전쟁의 말을 십자포화로 쏘아댄다고 해서 대한민국이 겁먹을 것은 없다. 또 북한이 말과 행동으로 ‘금지선(red line)’을 거듭 넘어서다가 어느 날 치명적인 결과를 빚는다 해서 우리가 안타깝기는커녕 적극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는다 해도 남북 간에 큰 민간 피해를 입는다면 이것은 민족적 자해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처하고 북한에 대해서도 말을 삼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우선 진보진영과 진보적 지식인들은 북한에 대해 호전적 발언과 도발행위를 멈추도록 강력히 요구하고 강제수용소에 대해서도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인권존중을 촉구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진보진영이 이러한 태도 변경을 하지 않으면 이른바 ‘종북논쟁’에 휩쓸려 국민적 지지기반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또 우익 보수진영도 호전적 막무가내 주장을 자제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국내 극우파의 정치적 수사는 북한의 그것을 거울에 그대로 비친 것인데다 지역주의의 독풀을 섞어 더욱 고약하다는 느낌을 준다.

언론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전제이고, 좌익과 우익이 모두 ‘사상의 시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남과 북을 가릴 것 없이 욕설과 협박, 공격과 억지, 이념과 편견이 한데 어울려 잡탕을 이룬 ‘말의 성찬’을 먹으라고 강요하는 우리의 현실은 역겹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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