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수퍼 싱가포르’가 되려면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다. 어떤 점에서는 나라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기도 한다. 단순히 인구가 적고 면적이 좁은 도시국가여서가 아니다. 북한을 김씨 왕조가 3대에 걸쳐 지배하고 있듯이 싱가포르는 리콴유-리셴룽 부자가 고촉동이라는 관리인을 사이에 두고 1959년 이래 통치해온 봉건시대 장원이라는 느낌을 준다.
마치 수호지에 나오는 ‘축가장(祝家莊)’처럼 한 유력가 집안이 수십 리 내지 수백 리에 걸쳐 땅을 차지하고 수많은 하인과 소작인을 거느리고 대대로 왕 행세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싱가포르에는 민주제도가 있을 뿐 민주정치가 없고,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라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이다.
정치적 각성과 함께 언론의 자유는 물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적극 행사하는 중산층이 아직 두드러지지 않은 것도 문제다. 최근 들어 리씨 부자의 인민행동당(PAP) 일당독재의 철통같은 장악력이 조금 느슨해지고 야당의석도 약간 늘어나는 추세지만 정권교체의 전망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사회문화적으로, 청교도와 비슷한 도덕주의와 ‘돈이 모든 것’인 쾌락주의가 기묘하면서도 예사롭게 공존하지만 기본적으로 획일성이 군림하는 곳이기도 하다. 돈이 오래되면 귀족이 되는 법인데 싱가포르는 아직까지 고급 문화예술을 꽃 피우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고 선진국 가운데 소득불평등의 척도인 지니계수가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더욱 근본적으로, 싱가포르는 언어, 종교, 풍습이 제각각인 전환기의 사회다.
그런데 이런 싱가포르가 왜 우리의 관심거리가 되고, 심지어 하나의 본보기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한국은 건국 이후 냉전시대를 지나오면서 미국의 영향권에 머물러왔다. 많은 면에서 미국의 제도와 기술,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미국을 우리의 발전모델로 삼기에는 국가의 특성과 여건 모두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이 때문에 한국은 내심 가까운 일본을 모델로 삼고 경쟁의식을 불태워왔다.
미국이 ‘넘버 원’이고 일본이 ‘넘버 투’라면 우리가 일본을 바짝 뒤쫓으면 최소한 ‘넘버 쓰리’는 될 것이고 잘하면 ‘넘버 투’도 넘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한참 앞서가던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을 거치면서 중국에게 추월당하고 기세 상으로는 한국에게도 밀릴 듯한 기색을 보이자 새로운 문제가 제기됐다. 이제부터 어떤 나라를 발전모델로 삼을 것인가. 일본은 한때 미국을 유일한 모델로 삼았다가 미국이 더 이상 지표가 될 수 없다고 느낀 뒤 갈 길을 찾다가 실패해서 저 지경이 됐다는 평가도 일리가 있다.
지금 이 시기에 독자적인 국가발전 방략을 세우는 것이 긴요하고, 실제 그런 노력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의 지도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다른 나라의 역사와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생긴다.
역사 속의 강국 가운데 우리가 가장 본보기로 삼을 만한 나라는 아마 17세기 네덜란드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17세기와 여러모로 다르기 때문에 네덜란드 모델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기울어져 가는 나라들이어서 따로 배울 것이 마땅치 않다. 중국을 비롯한 이른바 브릭스(BRICS)국가들은 우리와는 규모가 다른 나라들이고, 무엇보다 사회문화적으로 후진국이라 논외일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의 1인당 GDP는 5만9900달러(2011년 구매력 기준)로 리히텐슈타인, 카타르, 룩셈부르크, 버뮤다에 이어 세계 5위다. 개방과 청렴이 특징인 싱가포르 경제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연 평균 8.6%의 실질 성장을 했고 2010년 대불황의 여파로 1%에 그쳤지만 2011년에는 14.8%의 고속 성장을 시현했다. 싱가포르는 또 전체 가구의 15.5%가 100만 달러 이상의 순자산을 보유해 백만장자가 많기로 세계 제1이다. 이 나라는 세계 네 번째의 금융센터이고, 세 번째 가는 정유능력을 갖고 있으며 다섯 번째의 항구이다.
세계은행은 싱가포르가 ‘비즈니스하기 좋은 곳’으로 1위이며 세계 제1의 물류 허브라고 평가했다. 2007년에 이미 방문객이 1000만 명을 초과했고 2005년에야 시작한 카지노산업이 세계 2위다. 또 흔히 싱가포르가 금융, 보험 등 서비스업만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는 제조업 생산액이 26.6%를 차지하는 공업국이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진정한 강점은 국가 리더십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정책을 펼쳐 왔다. 스위스처럼 중립국임을 표방하면서 항상 승자와 절친한 친구가 되고 패자와도 관계를 유지한다. 복지정책을 중시하고 교육·의료·주거 복지를 제공하면서도 과잉복지는 거부한다. GDP의 4.9%를 국방비로 쓸 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징병제를 고수한다.
제1 공용어인 영어에 이어 중국어를 제2 공용어로 채택하면서 인구 대부분이 중국 남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남부 방언이 아니라 베이징 말인 표준어(보통화)를 지정한다. IT와 BT 등 첨단산업은 물론 의약품 생산과 의료관광, 국제교육, 컨벤션산업 등 유망분야를 찾아내고 외국 기업 현지법인이 1만개나 될 정도로 인프라를 잘 갖춘다. 이밖에 지도부는 1960~1970년대 ‘두 자녀만 낳기’ 운동을 벌이다가 1980년대 들어서는 출산 장려로 가족계획 정책을 바꾼 데서 알 수 있듯이 기민했다.
한국은 싱가포르에 비해 면적은 140배, 인구도 10배나 많은 나라다. 또 몇몇 세계적 대기업을 포함해 싱가포르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제조업과 기술 기반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유구한 문화 전통과 민족적 자긍심, 스스로 민주화를 쟁취한 자랑스러운 역사와 한류 등 소프트 파워를 보유하고 있다.
이제는 이념을 넘어서서 실익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리더십과 부패 척결과 공평 사회 건설의 의지를 가진 정치인들이 등장할 차례다. 싱가포르는 출산 장려를 하면서 장애인 출산부터 권장한 것이 아니라 고학력 미혼여성의 결혼과 출산을 위해 결혼중매기구도 만드는 융통성까지 발휘했다.
서울 등 수도권에 이어 부산에서 여수에 이르는 남해권에 또 하나의 싱가포르를 건설하면 한국은 ‘수퍼 싱가포르’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북한과의 통일을 이루면 1~2개의 싱가포르가 추가로 생기는 것은 물론 대륙과 해양을 잇는 아시아 최대의 허브 국가가 나타나게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