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보편적 기본소득보장제, 복지논쟁 잠재운다

패트러스 아나니아스(Patrus Ananias) 브라질 사회발전·빈곤퇴치부 장관이 ‘볼사 파밀리아’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전 국민 1인당 월 40만원 일률지급…경제활성화 효과도

이렇게 생각해 보자. 2018년 1월1일부터 당신은 정부로부터 매달 돈을 받게 된다. 당신이 만 20살 넘었다면 무조건 월 40만원이 당신 계좌로 꼬박꼬박 들어온다. 1년이면 480만원인데 연말에 20만원 보너스를 보태 연 500만원을 꽉 채워준다.

아, 이걸 받으려면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한다. 외국인 거주자나 영주권 소지 외국인은 안 되고 이중국적자와 외국 영주권을 받아 이민 간 사람도 제외다. 한국인도 1년에 6개월 이상 한국에 거주한 사람이 지급대상이다. 외국에서 출생해 한국에 귀화한 경우에도 국적을 취득한 지 10년이 넘었거나 소득세를 5년 이상 냈으면 똑같이 받을 수 있다.

당신이 학생이거나, 군에 갔거나, 감옥에 있어도 상관없다. 무조건 월 40만원이다. 회사를 다녀도 봉급과 상관없이, 아니 월급에 얹어서 40만원이 들어온다. 설사 당신이 재벌 아들 손자여도 받고, 엄청난 돈을 버는 인기정상 배우여도 매달 현금을 받는다. 정부에서 돈을 받는 대신 해야 할 의무는 뭐냐고? 없다. 취로사업에 나가지 않아도 되고, 자원봉사에 등 떠밀릴 일도 없다. 심지어 성년이 됐으니 돈을 달라고 신청할 필요도 없다. 만7살 되면 취학통지서가 나오듯, 공무원이 의무적으로 당신을 찾아 자동입금 시키지 당신이 찾아가서 돈 달라고 손 벌릴 일이 없다.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물어보거나 심사하는 일도 없다. 이건 복지나 자선이 아니라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UBI) 보장제이기 때문이다.

UBI와 더불어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제도가 ‘사회적 지분급여(Social stockholder grant)’와 ‘주택수당 바우처(Housing allowance voucher)’ 제도다. 사회적 지분급여는 성년이 된 국민에게 일정한 목돈을 지급해 교육과 창업, 가족형성 밑천으로 삼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20살부터 30살 사이에 2000만원을 한번 지급하는 방식이나 1000만원씩 2번 또는 500만원씩 4번 지급하는 방식이 있다. 주택수당 바우처는 내 집 마련이나 주거공간 확보를 돕기 위해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지불보증서(바우처)를 개인에게 발급해 공영주택 구입자금이나 전·월세 보증금 등의 용도로만 쓸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이들 제도는 UBI의 필수적 보완책이지만 여기선 논외로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그 돈이 다 어디서 온다는 거야”하는 재원문제일 것이다. 간단한 산수를 해보자. 2013년 6월 현재 한국의 주민등록상 인구는 약 5104만 명, 이 가운데 20살 이상 성년인구는 약 4007만 명이다. 계산 편의를 위해 4000만 명이라 가정하고 이들에게 연 500만원씩 지급한다면 총액이 200조원이다. 2013년 대한민국 정부 예산은 342.5조원이다. 200조원을 UBI로 지급해도 142.5조원이라는 거액이 남는다. 참고로 2002년 국가예산이 총 146조원 규모였다.

UBI 도입과 함께 잡다한 복지예산이 폐지·절감될 것이기 때문에 재정지출 소요액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아울러 차제에 각종 보조금을 전면 철폐해 공무원들이 국가예산을 제 주머니 돈처럼 멋대로 쓰는 것을 막고 보조금 수혜자들이 ‘눈먼 돈’을 나눠 먹는 폐습을 없앤다. 정부가 나눠주는 각종 보조금은 그 규모가 얼마인지 정확한 통계를 찾기 힘들다. 보조금은 관료들의 권력도구고 감춰진 금고이기 때문에 갖가지 명목으로 분식하고 지출용도를 섞어놓아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보조금 실상을 간접적으로라도 파악하려면 정부 예산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2013년 예산을 분야별로 보면 보건·복지·노동 97.1조, 공공행정 57.3조, 교육 49.1조, 국방 34.6조, 사회간접자본 23.9조, 농림·수산·식품 18.3조, 연구개발 16.9조, 산업·중소기업·에너지 15.7조, 공공질서·안전 15.0조, 환경 6.3조, 문화·체육·관광 4.8조, 외교·통일 4.1조원 순이다. 이 가운데 복지·노동예산은 절반 가량이 현금지급액인데 대부분 UBI급여로 대체할 수 있다. 교육부,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산업통상자원부는 아예 폐지해야 한다. 이들 부처는 특정부문을 진흥한다는 명목 아래 보조금 지급하는 것이 주업무이기 때문이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은 회계 자체가 독립돼 있기도 하지만 UBI를 도입하더라도 존속시키는 것이 옳다. 국민연금은 가입자 기여금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UBI에 추가로 급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 세대가 돈을 끌어다 받고 부담을 훗날 세대에게 떠넘기는 세대 간 도둑질(generational theft)을 막기 위해 수령액을 좀 줄일 필요는 있다. UBI 도입과 함께 공무원·군인·사학연금 등 공적 연금은 형평 차원에서 국민연금과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의무교육이 국민 의식수준을 높였듯이 UBI가 도입되면 국민 각자가 절대생존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자기실현, 사회적 기여에 더 힘을 쏟게 된다. 사진은 영국의 한 거리에 붙은 기본소득보장 요구 포스터

보조금 철폐, 정부 축소로 재원 충분

교육부는 초·중등교육 지원업무를 교육자치제 취지대로 시·도 등으로 완전 이관하고 조직 자체를 없애야 마땅하다. 국토교통부도 마찬가지다. ‘토건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사회간접자본 유지·발전은 기획재정부의 고유사무 가운데 하나다.

가장 심각한 건 농림축산식품부다. 정부통계에 따르면 2011년 농림업 생산총액은 43.2조원인데, 이 중 생산활동에 의해 새로 산출된 부가가치는 26.6조원이다. 2013년 농림부 예산 18.3조원 가운데 약 20%가 각종 보조금으로 집행된다. 농·축·수협 등 다른 기관을 통해 지출되는 돈을 합하면 농림업 부가가치 총액에 육박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보조금을 통해 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설립된 부처다. 민간주도경제로 접어든 지 오래인 지금 산업정책이란 명목으로 돈을 나눠주며 시장경제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 이들 부처를 폐지·대체할 때 얻을 수 있는 절감액은 상당 규모다. 여기에 공무원 30∼50% 인원 감축을 단행하면 퇴직금·연금·위로금 지급을 감안하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다.

UBI보장제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세제개혁이 필수적이다. 예산절감만으로는 부족하고 세수증대가 병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율과 세수의 관계를 나타내는 래퍼 곡선(Laffer curve)을 고려하면 세율인상만이 능사는 아니다. 단순히 세금을 늘려서는 조세저항을 불러올 뿐 근본적인 조세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세율 인상으로 말하자면, 외국에서는 UBI보장제와 50%의 단일 소득세율을 연동하자는 제안이 나오기도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의 경우 연 1만 달러, 영국의 경우 주 130파운드(미화 200달러)를 지급한다면 현재의 복지지출액 범위 안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실증적 계산이 발표되기도 했다.

아프리카 남서부 나미비아에서 2008~09년 ‘기본소득’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만 2년 동안 1인당 월 100 나미비아 달러(한화 약 1만5000원)씩 조건 없이 지급했다. <사진=africalight.wordpress.com>

재원은 예산절감과 행정·세제개혁에서 나온다 치고 UBI의 부작용은 없을까. 아마 가장 큰 반대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건 없이 공돈을 준다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하려 하겠느냐”는 의문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고정관념이자 편견일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까지 시행된 소규모 UBI보장제 실험의 중간결과를 보면 사람들은 최소 수입이 보장될 때 생계 근심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교육투자와 창조적 경제활동, 가족과 이웃을 돕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무교육은 그 개념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에 처음 나타났다. 마틴 루터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종교적 이유로 의무교육에 찬동했고, 종교개혁의 물결이 닥친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먼저 법제화됐다.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빈한한 나라도 의무교육을 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비슷한 길을 밟아 언젠가 UBI보장제가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보편적 규범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오늘날 세계는 글로벌 생산과잉, 일자리 감소, 노동시간 단축 등 근원적 환경변화를 겪고 있다. UBI보장제는 이런 변화에 적응하면서 세계의 흐름을 선도할 수 있는 현실적 선택이다. UBI보장제의 기대효과는 무엇일까.

첫째, 절대빈곤 추방과 사회정의 구현이다. UBI보장제는 각종 사회부조제도와는 차원이 다른 사회적 평등장치다. 공산주의에서 말하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보다는 강도가 낮지만 제도의 온건성이 강점이다. UBI는 단순히 보편적 복지의 한 방편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구조와 생활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게임 체인저(game-changer)가 될 수 있다. UBI가 도입된다고 해서 모든 사회경제문제를 일거에 해소할 수는 없겠지만 절대빈곤과 생계에 대한 극단적 우려, 복지 사각지대 문제는 거의 없앨 수 있다.

둘째, 가난한 사람뿐 아니라 중산층과 부자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복지정책이 강화되면 중산층과 고소득층이 불만을 갖는다. UBI는 저소득층에게 의미 있는 생활부조가 되는 것은 물론 중산층과 부자도 직접 혜택을 받는다. 부의 재분배는 부자와 일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인센티브가 된다.

기본소득보장 요구 시위 모습. 한국에서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등이 UBI 제도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경제구조 뒤바꿀 ‘게임 체인저’

셋째, 복지국가의 부작용인 관료제도의 확대를 막고 행정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 복지행정에는 복잡한 제도와 규정, 형식적 절차와 과정, 자의성의 개입, 낭비와 사기 등이 널리 퍼져 있다. UBI보장제는 제도적으로 속임수와 협잡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복지사업을 관장하는 방대한 기구와 인원이 필요 없고 수혜대상을 심사할 이유도 없는 비교적 단순 정직한 급여·수급체계다.

보조금 철폐와 세제개혁, 예산낭비·오용·기만 방지, 정부기구·인원 슬림화, 공적 연금 통합과 이에 따른 정부 효율화, 재정개선은 긍정적 부대효과다.

넷째, 경제 활성화와 범죄 감소를 기대할 수 있다. 브라질의 볼사 파밀리아 프로그램(Bolsa Familia Program)은 저소득 가구를 대상으로 한 현금급여 방식의 사회부조제도이다. 수급대상은 월 소득 120레알(약 8만원) 이하의 빈곤가구, 급여액은 월 15~95레알(약 1만~6만원)이다.

재원은 기존 세금과 금융거래에 부과하는 연방 세입이다. 전체 국민의 25%에 이르는 1100만 가구, 4600만명을 대상으로 총 정부지출의 2.5%에 해당하는 비용을 집행하고 있다. 그런데 브라질의 낙후지역인 북부에서는 이 소액의 돈이 지역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마중물이 되고 있다. 현금소득이 전혀 없던 사람들이 돈이 생기자 생필품 소비를 하고 이에 맞춰 소규모 자영업 가게들이 족족 생겨났다. 새로운 경제순환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보편적 기본소득제는 사실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중국 고대 주나라의 정전제나 북위∼당나라의 균전제, 이익·박지원의 한전제 등은 모두 일정 요건 국민에게 농업사회의 생산수단인 토지를 나눠주는 제도들이고, UBI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1795년 토머스 페인, 1918년 버트란드 러셀의 제안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예크와 밀튼 프리드먼 등은 모두 기본소득제 찬동자들이다.

한국은 불교·유교·기독교 등 외래 종교와 공산주의·자본주의 등 외래 이념·체제를 받아들여 극단으로 밀고 나간 경험이 있다. 그런데 UBI보장제는 공교롭게도 좌파와 우파가 합의할 가능성이 있는 사회프로그램이다.

좌파가 볼 때는 사회평등으로 가는 한 걸음이고, 우파가 볼 때는 방대한 관료주의를 지양하고 ‘작은 정부’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파에 한국의 기득권구조에 기생하는 일부 패권주의 극우세력은 해당되지 않는다. 이 제도에 반대할 사람들은 관료와 재벌, 정치인, 유산계급 등 현상유지를 원하는 기득권세력이고, 찬성하는 사람들은 좌든 우든 현상 타파를 원하는 개혁세력일 것이다. 현재를 바꿔나가는 출발점은 ‘될성부른 생각(seminal ideas)’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