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아소 다로와 아베 신조 ‘역할분담’
아소 다로의 야비함, 아베 신조의 용렬함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의 “일본은 나치가 바이마르헌법을 개정한 방식을 본받아야 한다“는 7월29일 발언이 나라 밖에서 큰 부정적 반향을 불러왔다. 하지만 정작 일본 국내에서는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을 뿐 거센 비난을 받지 않고 넘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때 일본의 좌파 지식인들이 보인 비겁한 반응이 떠올라 착잡한 심사를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 자유주의 정치개혁과 사회주의 도입을 부르짖던 ‘진보적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일본과 조선의 합방은 동양평화를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며 일본의 조선 강점을 환영하고 정당화했던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1912년 다이쇼 덴노의 즉위와 함께 공식 출범하지만 1906년 일본 사회당 창당이 보여주듯 그 이전 진보진영의 자유화 운동과 사회개혁 요구는 이미 대고조(大高潮)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의 양심세력이라 자처하던 운동가들이 거의 예외 없이 자신들의 원칙을 저버리고 이웃나라에 대한 침략을 용인했을 뿐 아니라 적극 동조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번에도 일본의 <마이니치신문> <도쿄신문> 같은 중도성향 신문은 물론 <아사히신문> <호카이도신문> 등 이른바 진보성향 신문들도 아소 다로의 ‘나치 발언’에 대해 조그맣게 취급했을 뿐 크게 문제를 삼지 않았다. 이들 언론이 나치 발언의 심각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아소의 행태를 조금 창피하게 여기고 ‘국익’차원에서 축소 보도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야당이 파면 요구를 하는 등 의례적 항의를 했을 뿐 시민단체 등이 나서서 강력한 비판을 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일본의 진보진영은 아무래도 원칙과 용기가 모자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소 자신은 “내 말이 뭐가 문제냐”는 오연한 태도를 보이다가 미국 유대계 언론과 유대단체들이 비판에 나서고 일본 정부가 거리를 두는 등 사세가 불리해지자 황급히 발언을 공식 취소했다.
우리는 한국 언론이 아소 다로 같은 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거나 역사문제에 대한 왜곡 발언(우리는 흔히 ‘망언’이라 부른다)을 할 때마다 펄펄 뛰며 핏대를 올리는 것을 보고는 한다. 그때마다 나는 일본 정치인들이 국내 정치에 이용할 목적으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에 대해 때마다 흥분하거나 일일이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번 아소 다로의 발언은 눈앞의 정치적 이득을 계산해서라기보다 일본 지도세력의 원모와 속내를 드러낸 측면이 있어서 주의 깊게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 집권 자민당은 지난 7월 참의원선거에서 대승을 했기 때문에 굳이 지금 이시기에 지지세력을 결집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소 다로의 ‘혼네(本音)’는 무엇일까. 그리고 아베 신조의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 내 생각에 아소 다로의 나치 발언의 뿌리는 메이지 과두체제의 이른바 ‘번벌(蕃閥)’들이 내세운 ‘부국강병’이란 슬로건이다. 부국강병이란 말 자체는 중국 전국시대에서 끌어왔지만 메이지 일본의 가까운 모델은 프러시아였다. 아소 다로와 아베 정권의 지도층은 메이지 유신의 되풀이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 마음 속의 본보기는 이번 경우 프러시아보다 나치 독일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히틀러가 어떻게 세계공황 직후의 독일 경제를 되살렸고 재무장을 했으며 국가위신을 높였는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던 끝에 아소 다로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그런 발언이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아소 다로는 현재 재무상을 맡고 있는데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데 더 정신이 팔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아소 다로와 아베 신조의 관계는 무엇일까. 내 눈에는 아소 다로가 아베 신조의 아바타를 자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아소 다로는 아베 신조가 총리로서 하기 어려운 말과 행동을 대신 해주는 악역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바꿔서 말하면, 아베 신조는 지킬 박사이고 아소 다로는 하이드씨인 셈이다. 두 사람은 모두 일본의 정치 명문가 태생의 2세 정치인이며, 총리를 역임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아소 다로의 용모가 좀 심술궂고 못되게 생겨서 야비한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또 아소는 “죽고싶은 노인은 얼른 죽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한 것”이라는 등 문제 발언을 많이 했다. 반면 아베 신조는 비교적 거부감을 덜 주는 인상이고, 말도 가급적이면 가려서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그러나 아베가 하는 짓을 보면 옹졸하고 용렬하다는 느낌을 피할 길 없다.
아베 신조의 진짜 문제는 식견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역사가 이븐 칼둔은 군주가 지나치게 명민함은 정치 지도자로서 결함이라고 했다. 너무 생각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도자가 우둔하면 그 또한 재앙이다. 어리석은 지도자는 지나치게 완고하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는 아무래도 두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 같다. 일관성이 있는 것은 좋은데 융통성과 유연성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이런 결점은 특히 외교정책과 방위전략에서 두드러진다. 그는 중국과의 관계 설정에서 외교적 상상력과 대담성을 전혀 발휘 못한 채 고집스럽고 편협한 태도로 시종하고 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어찌 보면 동북아 다자관계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과에 대해 파격적이고 진취적인 조치로써 관계개선의 돌파구를 찾기는커녕 애매한 동남아와 서남아 국가들만 돌아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유권자가 지난 선거에서 아베노믹스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자민당에 승리를 안겨준 것은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일이다. 지난 2009년 일본 자민당의 54년 일당독주를 끝내고 민주당의 정권의 정권교체를 허락했지만 결과는 실망과 환멸의 연속이었다. 이른바 임기 1년의 ‘회전문 총리’가 이어져 국제사회는 일본 총리 이름을 기억하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더욱이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3·11사태’라 불려야 할 정도로 일본 민주당정부에 치명타였고 일본 사회에도 심대한 충격을 줬다. 결국 일본 유권자들은 말을 갈아타기로 했고, 현실적 대안은 자민당뿐이었다.
아베는 △공격적 금융완화 △융통성 있는 재정정책 △장기 성장전략을 내용으로 한 ‘아베노믹스’를 내걸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엔화 가치를 절하하고, 돈을 최대한 찍어서 풀고, 물가인상률 목표를 2%로 정하고, 이자율을 최대한 낮추고, 공공투자를 늘리고, 일본은행이 채권을 사들이게 하는 등 조치로 일본 경제를 물가하락과 불경기의 늪에서 빠져나오도록 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베노믹스가 처음 나왔을 때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성공 가능성이 꼭 높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 입장으로서는 이판사판 무언가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20년 경제불황 때문에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상황이라면 가만히 있다가 고사하느니 차라리 경제실험 끝에 폭사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아베노믹스의 1단계는 한정적 성공이었다고 본다. 경제지표와 선거결과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제부터 곳곳에 난관이 버티고 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 참가하는 결정 자체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차후 가입이 결정되면 농민과 자영업자, 내수산업 등 이익집단의 엄청난 반발과 압력에 맞서게 될 것이다.
또 현행 5%의 소비세가 계획대로 2014년 8%, 2015년 10%로 오를 경우 만만치 않은 조세저항과 함께 심각한 소비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베 정권이 추진하려는 법인세 인하도 야당의 반발로 쉽지 않을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농업·의료부문의 개편과 노동시장·기업지배구조 개혁 등 장기 과제는 산적해 있다.
아베의 앞길이 첩첩산중이라고 하지만 일본 국민의 참을성 있는 지원을 받는다면 여러 굽이 경제적 난관을 뚫고 나갈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문제는 일본의 장래를 좌우하는 외교국방정책의 향방이다. 아베 신조와 아소 다로 등 현 일본 지도층이 나치 독일식의 부국강병책을 꿈꾼다면 시대와 지리를 착오한 일대 오산에 불과하고, 결국 일본을 고립과 위축으로 몰고 갈 개연성이 엄존한다. 일본이 실제로 나치의 길을 밟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낮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의 하나 재무장과 공격적 군사행동에 나선다면 자기파멸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다.
이미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아베와 아소의 생각을 이제 와서 새삼 고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일본 국민은 적당한 시기에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용렬하고 야비한 아베아소 커플의 위험한 실험을 중단시킬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본이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다면 제발 이번에는 좀 폭이 넓고 품위 있는 인물을 골라줬으면 하는 생각이다. 또 지도자 한 사람만으로 정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면 일본에서 하루 빨리 온건·합리적이고 수준 있는 정치대안세력이 출현하기를 바란다. 아베 신조와 아소 다로의 야스쿠니 쇼는 앞으로 그만 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