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중국에서 보시라이(簿熙來)에 대한 ‘세기의 재판’이 진행됐다. 인구 3000만 명에 이르는 충칭직할시 당서기와 중공 정치국원이란 정점에서 일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보시라이는 산둥성 지난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열린 5일 간 형사재판 최후변론에서 약 40억 원의 뇌물 수수와 직권남용, 공금횡령 등 자신에 대한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재판 첫날 법원에 의해 공개된 사진 속 보시라이는 수갑이나 포승줄에 묶이지 않은 데다 죄수복이 아닌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보시라이 양 옆의 법정 경위들이 매우 커서 키가 183㎝인 보시라이가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다는 점이다. 예로부터 체격이 건장한 사람이 많기로 유명한 산둥성에서 열린 재판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경위들이, 받침대를 놓고 올라선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195㎝ 쯤의 거인들로 보인다는 것이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 상의 중론이었다. 인물이 준수한 것으로 알려진 보시라이가 법정의 피고이면서도 오히려 두드러져 보일까 걱정된 당국의 안배일 것이라는 추측이 이어졌다.
이번 재판에서 정식 기소된 보시라이의 부패 혐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수 관측통들의 견해다. 불과 17개월 전까지 국가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보시라이가 일부 보도처럼 수억 달러 이상의 비자금을 해외로 빼돌린 것으로 밝혀진다면 태자당 출신 시진핑 주석을 포함한 국가 지도부 전체의 청렴성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여론의 도마에 오를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따라서 보시라이의 혐의는 최소한으로 축소됐고, 이미 널리 알려진 다롄 스더그룹 쉬밍 회장과의 뇌물 수수관련 등으로 사법처리의 범위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보시라이는 ‘중국의 케네디’라는 비유에 손색이 없을 만큼 대중적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었다. 중국 공산당 ‘8대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인 보이보의 아들이자 시진핑과 더불어 태자당 출신 정치인의 대표적 존재다. 1949년생인 보시라이는 1953년생에 키 180㎝인 시진핑보다 네 살 위고, 키도 한 치쯤 더 크다. 베이징대학 역사학과를 다닌 보시라이는 칭화대 화공과를 나온 시진핑보다 용모뿐 아니라 언변이 더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성격이 대담하고 화려한 보시라이가 ‘때리며 자라난 아이’였다면 소심하고 참을성 있는 시진핑은 ‘맞으면서 큰 아이’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보시라이는 16년간 랴오닝성 다롄시의 시장과 당서기 등을 역임하며 공원을 늘리고 오토바이를 금지하는 한편 일본으로부터 투자를 유치해 중국 동북에서 가장 성장이 빠른 도시로 만들었다. 이어 중앙정부의 상무부장을 거쳐 5년간 충칭시의 봉건 영주로 군림했다.
충칭은 도시구역 인구가 700만 명 정도에 불과하지만 1997년 쓰촨성이 인구 1억을 초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변 농촌지역을 통합, 3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탈바꿈했다. 보시라이는 복지 확대, 범죄 소탕, 혁명 찬양 등 ‘충칭모델’을 제시함으로써 혁명세대 노인과 젊은이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자본주의 지배와 빈부격차 심화 등 개혁개방노선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중국 신좌파세력의 총아로 떠올랐다.
보시라이의 진정한 죄목은 중국 지배층의 ‘밀실정치’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덩샤오핑은 1989년 천안문 사태 진압에 대한 후세 평가가 뒤집히는 것을 막기 위해 생전에 장쩌민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하는 것은 물론 후진타오를 장쩌민 다음의 차차기 지도자로 미리 지명했다. 2012년 후진타오의 임기가 끝났을 때 대권의 향방은 장쩌민의 상하이방과 후진타오 공청단파의 정치적 밀실 흥정으로 정해진 것은 다들 아는 일이다.
그런데 보시라이는 보수좌파 혁명세력에 기대어 대중을 향해 정치선전 드라이브를 걸었다. 서구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를 부정하는 지배체제와 지도자를 밀실에서 뽑는 관행에 정면 도전을 한 것이다. 특히 충칭시 당서기 전임인 왕양 광둥성 서기의 측근들을 부패 세력으로 몰아 철퇴를 가한 것도 ‘살아있는 권력’끼리 게임의 규칙을 어긴 것으로 간주됐다. 시진핑이 후계경쟁에서 승리해 차기 지도자로 확정되는 순간 보시라이의 몰락은 예정돼있었다 할 수 있다. 만약 승부가 뒤집혔다면 보시라이가 아니라 시진핑이 피고석에 올랐다 해도 놀랄 일이 없었을 것이다.
보시라이가 서서히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히 추락하게 된 것은 지난해 2월 측근 왕리쥔 부시장의 미국 청두총영사관 망명사건이 계기였다. 이 일의 여파로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가 영국인 브로커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엽기만화 같았던 사건이 공포영화로 치닫고 말았다.
구카이라이를 처음 알았을 때는 ‘희대의 독부(毒婦)나 범죄학의 연구대상‘ 정도로 여기기 쉽다. 그러나 사실 구카이라이는 서울 강남의 여느 평범한 아줌마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2012년 사건 이전의 구카이라이 사진과 최근 사진을 보면 아주 대조적이다. 권력자의 부인일 때는 독기 서리고 적의로 가득 찼던 강퍅한 얼굴이 영어의 몸이 되고 천길만길 구렁텅이에 빠진 지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아서일까 한결 더 편안하고 침착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보시라이와 시진핑은 똑같이 정략결혼을 했다가 이혼하고 아홉 살 연하의 여성과 재혼했다. 시진핑의 초혼 상대는 주영대사 딸이었고 재혼 상대는 여가수 겸 배우였다. 보시라이도 문혁기간 중 베이징 당서기의 딸인 여군의관과 결혼했다가 장인의 끈이 떨어지자 헤어지고 한국전에도 참전한 인민해방군 장성의 딸이자 변호사인 구카이라이에게 다시 장가갔다. 보시라이의 전처 리단위는 보시라이를 미워해서 외아들의 성을 어머니 성으로 갈도록 했다고 한다.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사이의 외아들 보과과는 영국의 사립명문 해로스쿨을 나오고 옥스퍼드대학과 하버드 케네디스쿨을 거쳐 미 컬럼비아대 법대에 재학중인데 고급 아파트에 살고 포르셰를 몰고다니는 등 사치스런 생활로 알려졌다. 일개 영어교사였던 닐 헤이우드는 보과과가 자신의 모교 해로스쿨의 입학허가를 받도록 돕겠다고 제안함으로써 구카이라이에게 처음 접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대도시 당서기 등 고위직의 연봉이 약 2만 달러에 지나지 않는데 연 4만8000달러의 사립학교 학비를 어떻게 감당했는지 의문이 자주 제기돼 왔다. 결국 권력과 돈에 대한 탐욕 외에 한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맹목적 사랑과 집착이 결국 비극적 파멸을 불러온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