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국가정보원 해체해야 할 4가지 이유

국가정보원

국정원 댓글의혹 사건과 관련해 핵심증인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국회 청문회에 나왔지만 진상을 털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국정원 사태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이들이 정확히 사안의 본질과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다.

최근 <중앙일보>에 실린 시평에서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이번 사건이 “국가정보기구가 최고책임자를 정점으로 국내정치에 불법 개입하고 국가경찰과 함께 진실을 은폐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민주주의의 근간과 입헌질서 자체를 뒤흔드는 중대 범법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어 “정부 구성과 지도자 선출과정의 헌법적·법률적·절차적 흠결로 인해 탄핵소추와 헌법재판과 선거무효가 거론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도 “절차적 정당성과 헌법적 안정성 모두를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하는 현실에서 대통령의 사과와 재발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과 기구 개혁 등 정치적 접근이 효율적”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구구절절 온당한 평가이자 합리적 대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국정원의 기구개혁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자. 윤영미 평택대 교수는 <서울신문> 기고문에서 최근 국정원 사태와 관련해 ‘국정원 국내파트 해체’ 주장은 “국정원 고유의 기능 훼손이자 국가안보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국가안보와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뚜렷한 대안 없이 조직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니 국정원 개혁은 정보전문가들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정보 전문가들에게 개혁을 맡기자는 그의 제안은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자’는 것과 다름없는 둔사(遁辭)라고 할 것이다.

나는 국정원은 해체하는 편이 좋다고 본다. 그리고 대체정보기관을 만들 필요는 있지만 기존의 정보기관과는 전혀 다른 개념과 기능, 구조와 인력, 규모와 예산을 갖는 기구를 신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미래의 정보기관은 인터넷 기반의 사이버정보 전문 탐색·감시 기능과 빅데이터 등 공개정보의 수집·해석·활용 기능, 위성 및 유·무인기와 기타 원격침투 장비에 의한 정찰·감시정보 수집 및 분석 기능 등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이른바 대북·대외 인간정보(humint)와 군사첩보, 국내 방첩 및 사찰, 테러방지 등은 군과 경찰, 외교부 등 정부부처와 민간기관에 맡기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공직자 부패와 범법행위 등은 검찰과 경찰, 감사원, 권익위원회와 함께 고위공직자비위수사처 등 특별수사기구를 신설하면 된다. 또 사이버 테러 방지와 컴퓨터 보안을 위해 국군 사이버사령부를 최대 1만명 수준까지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국정원을 단순히 개혁하기보다 해체해야만 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국정원은 정치에 개입해왔다.

국정원은 출범 초기부터 국내정치에 줄곧 개입하고 정치인들을 통제·조종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이처럼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조직의 정치지향적 특성은 ‘표범의 무늬’처럼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은 5·16쿠데타 직후 1961년 6월10일 중앙정보부 창설로 시작해서 5공 성립이후 1981년 1월1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했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9년 1월21일 국가정보원으로 재출범함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 중앙정보부 신설의 명분은 정부기관과 군경의 정보활동이 분산되고 제한됐던 것을 통합·집중·강화한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중정을 만든 실제 의도는 1) 쿠데타에 대항한 ‘반혁명’ 행위를 예방하고 2) 정부조직을 효율적으로 장악·지배하며 3) 국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만한 심리적 압박 기구를 만들고 4) 국내 정치를 실질적으로 통제·조종한다는 데 있었던 것은 두루 알려진 바와 같다. 그 당시 대북 정보 및 방첩기능은 이미 군·경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민간정보기관을 ‘옥상옥’으로 설치해야할 명백하고 긴박한 이유는 없었다.

중앙정보부는 국회의원과 야당, 언론과 비판적 지식인 등 국내 정치의 반대세력을 사찰·감시하는 수준을 넘어 적극적으로 매수·조종·침투·조작을 자행했고 여야를 떠나 당시 대다수 정치인들이 중정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음은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 있다. 이런 행태는 1980~90년대 안기부 시절에도 간접적인 수단이 더 많이 동원됐다는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동일한 양상이 지속됐다.

1998년 수평적 정권교체 이후 국정원으로 개편되면서 ‘정보정치’의 행태에는 일정한 변화가 있었고 특히 노무현 정부 때에는 정치개입이 부분적으로 제한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 국정원 내부는 이념 성향과 출신 지역, 인적 연고로 갈려 극심한 불신과 분열, 무위와 외부 ‘줄대기’가 성행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은 ‘대통령직(Presidency) 제도에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대통령(President) 개인에 대한 충성’으로 되돌아가 대통령의 요구와 지시에 맹종하고 봉사하는 조직으로 시종했음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국정원 댓글 의혹은 그런 행태의 한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검찰은 댓글의혹 수사를 통해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들이 인터넷 토론사이트에 1,977건의 댓글을 게시했고 1,711건의 찬반클릭행위를 한 것을 밝혀내고 2,120쪽에 이르는 ‘범죄일람표’를 공표했다.

댓글 사건이 단순히 원세훈 전 원장 개인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의 인지와 지시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정황증거가 드러나고 있는 이상 이명박 대통령의 법적 책임도 철저히 따져야 마땅할 것이다. 또 지난해 대선기간 중 새누리당 김무성 총괄본부장 등 선대위 간부들과 박근혜 후보가 얼마나 국정원의 개입을 알고 추인했는지 여부도 반드시 밝혀져야 할 사안이다.

결론적으로 국정원은 중정 출범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치에 대한 개입과 공작을 멈춰본 적이 없는 조직이다. 더욱이 남재준 현 원장은 댓글 공작을 정당한 행위라고 강변하고, NLL논란과 관련해서는 국가이익과 기관이익을 혼동하고 국가기밀을 자의 공개, 반격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이런 자격미달자를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정치적 행위를 묵인·두호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가장 근본적인 국정원 개혁방안은 단순한 조직 변화가 아니라 국정원 전 조직을 완전 해체한 뒤 대체기구를 순차적으로 설립하는 것이라고 본다.

둘째, 현재의 국정원은 무능하다.

국정원이 무능이 내과적 치료나 외과적 수술로 해결할 수준을 넘어섰다는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이 두 가지 예를 들면 된다.

국정원은 북한 김정은의 아내 리설주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의 이름은 물론 부인인지 여동생인지조차 몰랐다. 2012년 7월6일 새로 조직된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 당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최룡해와 함께 김정은의 바로 옆에 앉은 여성의 모습이 7월7일 <조선중앙방송> 보도를 통해 공개됐을 때 그 정체를 두고 안팎의 관심이 쏠렸다.

당시 남한 언론에서는 ‘여동생 김여정 설’과 ‘김정은 아내 설’이 나왔고, 심지어 ‘보천보전자악단의 가수 현송월’이라는 설도 제기됐지만 국정원에서는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못했다. 7월25일 북조선의 관영 매체들이 김정은의 능라인민유원지 준공식 참석 소식을 전하면서, “김정은 원수가 부인 리설주 동지와 함께 준공식장에 나왔다”고 밝힘에 따라, 이 여성이 김정은의 정식 부인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북한 지도자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북한 내부에서도 극히 제한적인 범위 안에서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김정은의 결혼 사실을 국정원이 즉각 파악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리설주가 공식석상에서 김정은 곁에 나타났을 때 여동생이 아니라 부인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금세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또 일단 얼굴이 공개된 이상 최소한 신원 확인은 가능한 정보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북한 매체들이 리설주의 이름과 신분을 공개 보도하는 순간까지 정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국정원은 북한 안에 정보 네트워크를 사실상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2011년 2월16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의 인도네시아 대통령특사단 숙소 잠입사건은 국정원의 무능을 만천하에 다시 한 번 드러낸 사건이었다. 다음은 당시 보도 내용이다.

“검은 정장 차림의 남성 2명과 여성 1명은 이날 오전 9시20분 쯤 인도네시아 특사단장의 측근인 아크마트 드로지오 보좌관의 객실로 들어갔다. 외출길에 나섰던 아크마트 보좌관은 빠뜨리고 온 물건이 생각나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떠난 지 불과 6분 만인 9시27분께였다. 방에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짐을 뒤지고 있었다. 보좌관과 마주친 괴한들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서 객실 밖 복도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아크마트 보좌관은 곧 정신을 차리고 복도로 황급히 나와 호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노트북 절도 사실을 알렸다. 이 직원은 곧 19층 비상계단에 숨어 있던 괴한들을 찾아냈고, 괴한들은 바로 노트북을 돌려주고 사라졌다.”

정체불명의 괴한들은 국정원 직원들이었던 것으로 곧 확인됐다. 그들은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국산 무기구입과 관련한 협상 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잠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멍청한 한국 국정원 직원들이 외국 특사의 컴퓨터를 훔치려 했다”며 원색적인 표현까지 사용했다. 국정원은 이 사건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했지만, 국정원 직원이 사건 신고 4시간 뒤인 2월17일 새벽 3시40분께 남대문경찰서를 방문해 사건에 대한 보안을 요청한 것이 확인되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이 사건은 국정원이 우방국 특사단의 숙소를 뒤졌다는 비신사적 행태와 조야한 수법도 문제였지만 요원들의 무모함과 비전문성이 더 심각한 결함이었다. 직업적 절도범이 아니더라도 남의 방에 잠입할 때는 주인이 방을 비운 직후 잠시 기다리는 것이 공작원의 ABC라고 한다. 잊어버린 것이 있어 돌아올 가능성이 늘 있기 때문이다.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이런 것으로 정보요원의 훈련도를 파악할 수 있고, 결국 공작의 성패를 좌우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했을 때 기념행사가 시작한 지 50분이 지나도록 때를 기다렸다. 행사가 시작할 즈음에는 경비 병력이 바싹 경계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긴장을 늦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을 때도 안 의사는 이토가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의장대 사열을 끝낼 때까지 기다렸다. 안 의사는 이토가 10m 이내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다음에야 총을 꺼내 든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반대되는 공작의 실패 사례로 1983년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을 들 수 있다. 당시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요원들은 행사 예정시각 10시30분보다 2분 전인 10시28분 미얀마 군악대의 연주가 시작되는 것을 듣고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판단해 폭파스위치를 눌렀고, 결과적으로 전 대통령 암살에 실패했다. 테러나 파괴, 암살 등 공작을 실행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결정적 순간을 기다리는 훈련을 제대로 못 받은 탓이고 정찰국 조직의 전문성 결여가 공작실패의 요인이라고 분석할 수 있다.

앞서 두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국정원의 무능이다. 먼저, 정보수집이나 분석판단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북한에 제대로 된 정보망이 없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어서, 정보요원들의 자질이나 훈련이 수준 이하고 일을 그르쳤을 때에 대비한 수습방안이나 예비계획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다.

셋째, 국정원은 돈을 낭비하고 있다.

국정원의 예산이 얼마인지는 공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1999년11월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2000년 정부예산에서 예비비 가운데 국정원 기밀비 전용 의혹이 있는 4,000억원 이상을 삭감하기로 했다.

13년전 예비비에 묻어뒀던 국정원 기밀비가 4,000억원 이상이었다면 기밀비의 전체 규모가 얼마였는지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기밀비가 본예산보다 클 리는 없다고 한다면 국정원의 1년 예산은 최소한 1조원을 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돈을 쓰는 국정원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앞서 리설주와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예를 본다면 국정원이 3류 조직에 불과하다고 비난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런데 국정원 직원들은 자신의 직급보다 1등급이 높은 급여를 받는 등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특정업무 경비와 특수 활동비가 상당한 액수인 것으로 알려졌다. 각종 수당과 퇴직후 연금혜택까지 모두 감안한다면 국정원 7급 직원도 역대 연봉자라 해도 큰 망발이 아닐 듯하다. 그런데 심리전단 요원 70명 등 국정원 억대 연봉자들에게 댓글을 달도록 시켰다는 것이 아닌가.

국정원이 예산을 펑펑 쓰는 것은 직원들의 인건비만이 아니다. 수서경찰서가 지난 4월 검찰에 송치한 수사 기록에 따르면 국정원 사건으로 경찰 수사를 받았던 일반인 이모(42)씨의 계좌에는 2012년5월부터 2013년1월까지 모두 9,234만원의 현금이 입금됐다. 이씨는 국정원 직원 김모(28·여)씨, 이모(42)씨와 더불어 온라인 상에서 여론형성 활동을 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던 인물이다. 경찰은 수사 기록에서 “이씨의 혐의 사실과 금융거래 및 체크카드 사용 패턴을 종합하면 이씨가 국정원으로부터 ‘정보원비’를 받아 이를 제2, 제3의 공모자들에게 재교부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고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국정원 직원의 상당수는 밥값을 못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댓글의혹사건으로 더 두드러졌다. 치열한 경쟁시험을 통해 가려 뽑은 정예 정보요원들을 인터넷 토론사이트에 시답잖은 소리나 지어내 올리도록 시키는 조직이 무슨 생산성이 얼마나 있겠는가. 댓글의혹은 공작의 불법성이나 정치적 악영향 이전에 정보기관의 효율성과 존재 가치에 대해 근본적 의문을 던져주고 말았다.

대북파트의 경우 예컨대 김영환 사건에서 불거진 중국내 대북공작의 성과가 무엇인지 확실히 따져봐야 한다. 국정원이 대북공작을 펼친다는 명목으로 주사파 전향분자들의 식당사업이나 돕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국정원 해외파트는 외교부보다 훨씬 적은 규모로 줄이고 국내 파트는 아예 폐지하는 한편 대북파트 역시 대폭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넷째, 정보기관 무용론은 전 세계적 추세다.

정보기관이 제 밥값을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각종 정보기관의 총 예산규모는 2012년 기준 750억 달러라고 한다. 세계 각국 중에서 단연코 가장 많은 돈을 정보기관에 퍼붓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그들 정보기관의 활동과 실적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9·11테러는 한참 전 일이라 넘어가기로 하고, 올해 4월15일 일어난 보스턴 폭탄테러사건을 보자. 테러가 일어나자마자 나는 범인 검거는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길거리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곳곳에 설치된 CCTV에 범인의 모습이 포착됐을 것이고, 일단 용의자가 특정되면 범죄정보DB에 수록된 인물정보로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분초를 다툴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FBI는 CCTV 사진에서 2명의 용의자를 추려냈다. 그런데 문제는 FBI 컴퓨터로는 용의자들의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사건 발생 3일 뒤인 4월18일 오후 용의자들의 사진과 비디오를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낼 수 있었다. 곧이어 총격전 끝에 범인 1명이 죽고 1명이 검거된 후 2011년 FBI가 러시아 정보부(FSB)로부터 범인들 가운데 1명이 ‘극단적 이슬람추종자’로서 테러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FBI는 FSB가 꼭 찍어 알려준 테러용의자를 한 번 찾아가 인터뷰를 했지만 무혐의로 판정해 흘려 넘겼고, 기록 관리도 제대로 안 하는 바람에 보스턴에서 테러사건이 터진 뒤에도 용의선상에 올리지도 못했던 것이다.

남의 나라 정보기관이지만 무능을 지나 대단히 황당하다는 느낌이고,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무책임을 넘어 참으로 뻔뻔스런 조직이란 생각이 든다. 세계적으로 앞서간다는 미국의 최고수사기관이 이 지경이니 다른 나라 정보기관들은 말할 나위 없다. FBI는 고사하고 NSA의 경우 더 한심하다. 미국이 제 나라의 테러용의자도 제대로 간수를 못하는 주제에 오지랖 넓게 세계의 테러용의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수십억 명의 이메일을 훔쳐보고 스카이프 통화를 도청하며 소셜미디어를 감시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미국과 영국의 국제 감시공작을 세계에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이 새삼 의인이라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세계와 인류, 국가의 이익보다는 조직의 이익과 정보계의 업권, 종사자들의 이득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기관의 전통적 정보수집과 분석은 큰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과거에도 정보기관 첩보의 70~80%는 언론 보도와 정부 보고, 학계 논문 등 공개정보에서 온 것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일반인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공개정보 때문에 그 비율이 90% 이상으로 올라가고 있다.

적진에 침투해서 최고 기밀을 뽑아내는 첩보원의 활약은 이제 소설에서나 볼 뿐 대부분 부적절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억대 연봉의 정예 요원들이 오피스텔 방에 쭈그리고 앉아서 익명으로 편파적 댓글이나 올리고 있는 현실이 이런 추세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종래의 정보기관은 더 이상 큰 소용이 없다. 과거에 집착하는 듯한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기간 중에는 이런 깨우침이 귀에 들어오기 어려울 것 같아 안쓰럽지만 정보기관 무력화의 큰 추세는 계속되고, 가속화될 것이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처럼 정보기관을 혐오하고 무시해서 고의로 무능한 사람을 수장과 간부로 보내놓고 조직개혁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방치한 어리석음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정원을 하루 아침에 탈바꿈시키거나 제대로 된 대체정보기관을 당장 만들 수 없더라도 집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다. 창조적 파괴를 하는 것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과거 아버지가 저지른 죄업 중의 하나인 ‘정보정치’를 우리나라에서 추방하는 것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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