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미 ‘인종주의’의 오만과 편견을 깨뜨리는 법
짐머만 사태와 아시아나 사고 ‘인종주의’
미국사회가 또 다시 인종문제로 들끓고 있다. 지난주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지머만 재판’ 무죄 평결이 내려지자 ?미국 주요 도시 곳곳에서 항의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지머만이 귀가 중인 17세 흑인 청소년을 뒤따라가 불심검문 하다가 시비가 붙고, 이어진 몸싸움에서 밀리자 권총을 꺼내 사살한 것이 정당방위였다고 배심원단이 본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자세한 경위를 떠나 무장한 자경단원이 비무장한 10대 청소년을 총으로 쏴 죽였는데 어떤 형태로든 법적 처벌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사람의 사회정의 감각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지머만이 흑인 청소년을 우범분자로 일단 간주하는 프로파일링을 하고 있었다면 인종차별적 범죄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지난 2002년 한국에서 효순·미선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사고 자체보다 미군당국이 사건을 처리한 방식과 결과 때문이었다. 미국이 한국에 비해 고의성 없는 사고에 대해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형법이나 군형법에 과실치사죄가 없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군사재판에서 중대한 주의태만행위에 대해 아무런 처벌을 않고 무죄 평결을 내린 데 대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모욕감을 느꼈다.
어느 나라도 완벽한 사법제도를 가졌다고 할 수 없지만 미국의 경우 O. J. 심슨 사건 등에서 드러나 듯 때로는 법이 웃음거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한국 법이 중대범죄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다면 미국 법은 장기형량을 남발하고 고액 변호사를 사서 기술적 절차문제로 범죄자가 법망을 빠져나가는 사례가 너무 많다.
미국의 인종주의(racism)과 관련해?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일어난 아시아나항공 214편 추락사고와 관련해 미국 극우언론 Fox News 계열사인 샌프란시스코 현지 KTVU-TV가?사고기 조종사들을 거론하며 조롱거리로 삼은 일이다.
이 방송은 조종사 이름이 “Captain Sum Ting Wong” “Wi Tu Lo’ “Ho Lee Fuk” “Bang Ding Ow” 등이라고 보도하면서 별도로 준비한 전면 자막까지 내보내 말썽이 됐다. 이들 이름은 ‘Something Wrong’ ‘We Too Low’ ‘Holy Fuck’ ‘Bang! Ding! Oh!’ 등을 패러디한 것으로 들린다. 조종사 4명의 실제 이름은 이종주, 이정민, 이강국, 방동원씨다.
방송국에서 날조했는지, 미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의 인턴이 지어냈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송국의 문의를 NTSB 인턴이 확인해 줬다는 보도가 뒤따랐다. 이후 NTSB가 문제의 인턴을 해고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었지만 문책에 대한 위원회의 공식 입장표명은 없었다. 샌프란시스코의 KTVU 방송은 “보도가 잘못 됐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저간의 사정을 종합해 보면, KTVU 앵커 등 보도진이 아시아인과 한국인을 웃음거리로 삼을 생각으로 이름을 만들어냈고, NTSB 인턴이 방송국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협조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아시아인을 패러디한 이름을 보면 누군가 한참동안 궁리해서 지어낸 것이지, 순발력이 뛰어나지도 못한 미국인들이 순간적으로 착안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NTSB는 “모욕적 이름들을 언론이 문의해 와 확인해 준 것은 권한을 벗어난 인턴의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아시아나항공은 “이번 보도는 조종사들은 물론, 회사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며 명예훼손으로 미국 법원에 민사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혔다가 막판에 철회했다고 한다. 아시아나가 고소를 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워싱턴포스트>는 에릭 웸플이라는 기자의 블로그에 ‘아시아나항공사의 바보같은 소송 위협’이란 글을 실어 노골적으로 헐뜯었다.
웸플은 “AP와 CNN 보도에 따르면 아시아나는 KTVU의 인종차별적 보도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 방송국을 고소하기로 결정했다고 대변인 이효민씨가 말했다”며 “방송국을 걸어 승소하려면 허위보도가 회사의 평판을 떨어뜨린 것은 물론 매출을 실제 감소시켰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라고 단언했다. 사고를 낸 책임에나 집중하고 미국 언론의 조롱조의 장난 보도에는 신경을 끄라는 훈계다.?<로스앤젤리스 타임즈>도 독자 의견을 통해 아시아나 고소를 비난하고 야유하는 글을 내보냈다.
한국 법에서 명예훼손을 폭넓게 인정하는 것과 달리 미국 법정에서 명예훼손 소송에서 이기려면 특정 언론보도의 ‘악의성(malice)’을 입증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에 따라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한다. 따라서 아시아나항공측의 반응은 일면 이해가 가지만 미국법에 대해 충분히 모를 뿐 아니라 다분히 경솔했다는 평가를 받을 소지가 있다. 아시아나는 항공운항에서 사고를 냈지만 미국 법 전문가의 의견을 들을 만한 능력도 없었던 것 같다.
내 생각에 아시아나항공사는 해당 TV방송국에 먼저 강력한 서면항의를 보내고, <워싱턴포스트>와 <로스앤젤리스 타임즈> 등에 논리적인 반론문을 보내 게재를 요구했어야 했다. 그리고 NTSB에 서면으로 왜 이처럼 인종차별 의혹이 제기되는 내용을 일개 인턴이 확인해 줬는지 경위를 밝히기 위해 즉각 철저한 조사를 해달라고 요구해야 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과 인종비하는 개인이나 회사의 명예훼손이 아니라 인권침해의 중대 범죄다.
아울러 데보라 허스만 NTSB 위원장인?사고 직후부터 TV 카메라 앞에 수시로 나서서 온갖 성급하고 부적절한 언급을 해왔으면서 자신의 책임 아래 있는 NTSB 직원의 실수에 대해서는 왜 무성의한 사과 한마디로 끝내는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표시해야 했다. 이럴 때 쓰라고 대변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NTSB가 납득할 만한 해명과 문책을 하지 않으면 NTSB를 상대로 인권침해 고소를 검토하겠다고 했으면 즉시 시정효과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데보라 허스만은 43세(1970년생)로 지난 2009년 이래 벌써 4년째 NTSB 위원장으로 재임해왔다. 그는 최고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항공안전 전문지식이나 기술관련 학위·경력도 없다. 대학시절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하원의원 사무실에 자원봉사 인턴을 하다가 졸업 후 의원실 직원으로 취직했고, 이후 미 상원 상업과학교통분과위원회의 직원으로 자리를 옮겨 19번의 교통관련 사고조사에 동참했다는 것이 자격의 전부다. 경력과 배경으로 미뤄 사고조사단에 사무지원이나 한 것이 고작일 가능성이 높다.
허스만은 더구나 올해가 임기 마지막 해다. 따라서 다음 임명직을 얻거나 정계 진출을 겨냥해 TV에 나서려고 기를 쓰고 있다는 의심이 짙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수시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추측성 발언을 남발하면서 아시아나 승무원의 기자회견에는 제동을 거는 등 이상한 행태를 보였다. 또 아시아나 사고가 조종사들의 한국문화 탓이라는 엉터리 기사가 나오자 “살펴 보겠다”고 엉뚱한 답을 하는 등 수준 이하의 언행을 보였다.
여태까지 NTSB 위원장은 전문가들이 맡아왔고, 항공사고와 관련해 이번처럼 경솔한 발언과 처신을 한 경우가 없었다. 이야말로 미국 관료사회를 망치는 엽관제의 폐해가 속속들이 드러난 경우고, 미국정부의 대외신인도를 땅에 떨어뜨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민주당원인 허스먼은 부시 전 대통령이 NTSB위원으로 발탁했지만 위원장에 임명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그도 책임을 면할 길 없다.
미국 내 아시아계 정치단체나 인권보호단체, 한국계 및 아시아계 변호사 등이 인종차별적 보도를 한 KTVU방송국에 항의하고 책임을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인회나 교민단체들도 여기 앞장서야 할 것이다. 또 NTSB와 허스만 위원장에 대해서는 법적, 정치적 책임을 추궁해야 마땅하다. 명예훼손을 배상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할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적 행위에 대해 형사고발을 하는 것이 법적으로나 여론 환기차원에서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본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의 권리는 보호 받을 수 없고, 한국인과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존엄과 권익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
더불어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계 변호사가 맬콤 글래드웰의 ‘항공기사고의 민족문화 기원설’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글(http://askakorean.blogspot.kr/2013/07/malcolm-gladwells-reponse-to.html) 처럼 일부 미국인들의 한국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지적하고 교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글래드웰은 이 글을 인터넷에서 읽고 직접 반론을 써서 블로그저자에게 보내왔다.
한국과 아시아에 대해 잘못된 주장과 의견이 나올 때 영어로 논리적 반론을 써서 알리면 세계가 주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어 구사에 어려움을 덜 느끼는 젊은 세대 지식인들이 이런 노력에 적극 동참하면 한국에 대해 올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인종비하적 비방(racial slur)을 추방하는 것이 우리 후대의 행복을 기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