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만달레이 가는 길에서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는?고상한 모습과 품격 있는 행동거지 때문에 ‘The Lady’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는 올해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자신의 나라를 ‘미얀마’ 대신 옛날 국명 ‘버마’라고 불렀고 자신의 이름도 ‘수치’ 대신 원음에 가까운 ‘수지’로 불러달라고 했다.
수지는 버마 군을 창설한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이고 지난 1989년부터 2010년까지 21년 가운데 15년을 군부에 의해 가택연금 당했다. 그가 이끄는 민주민족동맹(NLD)은 버마사상 유일한 자유선거였던 1990년 총선에서 전국 59% 득표와 81% 의석을 차지했으나 군부가 이를 무효화시켰다.
2010년 버마 군부독재자들이 군복을 벗고 형식상 민정이양을 했지만 NLD는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2012년4월 보궐선거에서 정당 등록이 허용된 NLD는 45개 의석 가운데 43개 의석을 획득했다. 아웅산 수지는 이때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됐고, 또 다른 쿠데타가 없는 한 오는 2015년 시행 예정인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버마에 가 본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어질고 땅이 풍요롭다’고 느낀다. 아울러 다른 많은 후진국과 마찬가지로 이 아름다운 나라가 독재정치 때문에 망가졌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들이 특히 버마 사람들에게 일종의 친연(親緣)감을 갖는 것은 버마인이 다른 동남아국가 사람들처럼 말레이인종이 아니라 티베트 쪽에서 내려온 티베트-버마인종이라 한국인과 골격이 비슷한 데가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예컨대, 아웅산 수지는 버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얼굴이다.
1989년 버마 군부가 재집권하면서 국호를 버마연방사회주의공화국에서 미얀마연방으로 개칭했다. 크메르 루지가 캄보디아를 한때 크메르라고 바꿨던 것과 흡사하다. 미국은 군사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계속 버마라고 불러왔고, 민주화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버마족이 다수(68%)지만 샨(9%), 카렌(7%), 라카인(3.5%), 몽(2%), 카친(1.5%), 친(1%)족 등 많은 소수민족이 있다. 때문에 나는 미얀마연방이 더 적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버마국민의 대표자의 뜻에 따라 일단 버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내가 버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때 조지 오웰의 처녀작 ‘버마에서의 나날들(Burmese Days)’을 읽고부터다. 우연히 미국인 교수로부터 소개를 받았는데 조셉 콘라드의 ‘로드 짐’처럼 모험과 액션이 넘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마음을 끌었다. 이 소설은 이라와디강 상류에 있는 소읍 카사(Katha)를 무대로 하는데 오웰이 24살 나이에 식민지경찰로 근무했던 곳이다. 양곤에서 기차를 타면 만달레이까지 14∼16시간, 만달레이에서 카사까지 다시 12시간이 걸린다.
내가 카사에 간 것은 2011년1월이었다. 만달레이에서 북쪽 카친주 수도인 밋치나(Myitkyina)로 가는 데 기차로 24시간 이상이 걸렸다. 사실 이제까지 러시아 시베리아횡단열차부터 미국, 중국, 인도, 이집트, 모로코, 아르메니아 등 온갖 열치를 타봤지만 버마의 기차는 특별했다. 우선 식민시대 협궤로 건설된 데다 독립이후 거의 보수가 되지 않은 탓인지 선로가 울퉁불퉁해 폭풍우 속의 배처럼 롤링과 피칭을 거듭했다. 그것도 모자라 때로는 말을 달리는 것처럼 출렁대는 것 아닌가. 게다가 3등 초만원열차인지라 사람들은 창문으로만 타고 내렸고 내 발 밑에는 내내 사람 머리가 누워있었다.
밋치나 가는 선로 옆에는 군인들이 수색작전을 벌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버마정부와 카렌족 사이의 내전은 일단락됐지만 카친족과는 지금 현재 전투가 진행 중이다. 카친주의 주도 밋치나는 정부군의 손에 들어있다. 그러나 길거리 표지판에는 버마글자와 함께 한자로 ‘密支那’라고 표기돼 있었다. 중국 국경에서 가까운 밋치나를 ‘비밀의 중국땅’이라고 부르다니 버마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허용한 것일까 의아했다. 하지만 카친주는 밋치나와 중국으로의 관문도시 바모도 중국의 세력권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만달레이로 돌아오는 길에 바모에서 이라와디강 페리를 타고 카사를 들렀다. 카사는 오웰이 경찰 근무를 하던 1927년 이래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갔을 때 18세기말 예카테리나2세 시절의 건물과 정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과 같았다. 카사에 게스트하우스가 두어 개 생긴 것 말고는 소설 속의 ‘유럽인 클럽‘도 겉모양은 그대로였다.
만달레이는 버마의 옛 수도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리적으로 경주보다는 평양에 비기는 것이 어울릴 듯하다. 버마는 서양인 특히 독일인들에게 인기가 있는데 주된 이유는 문학작품으로 인한 로망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가면 만달레이 베이라는 호텔이 있다. 꿈과 환상을 팔아 돈을 버는 라스베이거스가 만달레이를 호텔명으로 찍은 것은 그만큼 서양인들에게 그 이름이 어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글북의 작가 러드야드 키플링은 1890년 ‘만달레이’라는 시를 썼다. 그는 인도에서 영국으로 귀국하면서 미국을 거치기로 했고 버마에는 양곤과 물멩(몰라민)에 잠깐 기착한 것이 고작이었다. 몰라민은 살윈강의 하구에 자리잡은 항구도시인데 산등성이에 아름다운 사원이 있다. 키플링은 그 사원의 계단에서 아름다운 버마 처녀를 보았고 ‘만달레이’라는 시의 영감이 됐다.
이 시는 “만달레이 가는 길에서…”라는 말로 매 단락을 끝맺는데 당시 영국 군인들은 랭군(양곤)에서 만달레이까지 700㎞를 이라와디강 증기선으로 오르내렸다.
조지 오웰로부터 ‘대영제국주의의 시인’이라고 비판을 받은 키플링은 오리엔탈리즘의 원조 가운데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오웰 자신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키플링의 시 ‘백인의 책무(The White Man’s Burden)’는 지금까지 일부 백인들에게 남아있는 인종주의와 식민주의의 민낯이자 속내다.
버마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다. 자연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이 나라의 불교 승려들은 태국이나 스리랑카보다 훨씬 덜 썩은 것처럼 보여 좋았다. 붉은색 가사를 입은 승려들과는 달리 여승들은 분홍색 가사를 걸친다. 주로 병약한 부모를 모시다가 혼기를 놓친 노처녀들이 수도의 길에 들어선다고 한다. 범죄가 생기면 범인의 부모를 경찰서에 잡아와서 기다리면 대부분의 범인들이 자수한다고 한다. 그만큼 도덕률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거세다는 말이다.
오는 5월 벵골만의 짜욱퓨(싯웨)에서 중국 윈난성 쿤밍을 잇는 석유 및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완공된다고 한다. 2009년 착공한 25억달러 규모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중국은 말라카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중동 석유를 직접 도입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중국 국민당 정부에 군수물자를 공급한 ‘버마도로(Burma Road)’의 현대판이라 하겠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완공처럼 큰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이 사업으로 버마의 지정학적 가치가 다시 한 번 입증하는 순간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