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서원, 인문학 인재양성 ‘21세기형 서원’

동재반에서 김종석 홍익대 교수가 거시경제를 강의하고 있다. <사진=김남주>

신개념 융합학문 교육기관 ‘아산서원’ 1박2일 체험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 12월9일 오후. 서울 신문로에 있는 아산서원을 찾았다. 4기 원생들과 하루를 보내기 위해서였다. 요즘 대학생 사이에서 아산서원 인기가 높다. 5개월 간 미국, 중국 등 유수 싱크탱크 인턴십 기회와 함께 최고 교수진에게 인문학의 정수를 배울 수 있기 때문. 아산서원 관계자는 “1월 중순 마감하는 5기 모집에 벌써 3배수가 넘는 학생들이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5개월 국내 인문학 교육을 포함해 10개월 간 투입되는 비용이 1인당 60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고갈 원생들과 1박2일 함께 지내며 이들의 하루를 엿봤다.

9일 PM 4시 : 인문학을 배우다

“생산 없이 소득은 없습니다. 이 단순한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하죠.”

동재(東齋)에서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지낸 김종석 홍익대 교수의 거시경제 강의가 진행 중이었다. 길쭉한 타원형 테이블에 앉은 15명의 학생들은 자유롭게 질문을 던지며 강의에 열중했다. 교재는 그레고리 맨큐의 핵심경제학 원서. 남자 6명, 여자 9명, 3학년 학부생부터 대학원생까지, 전공도 공학, 국악, 법학 등 다양하다. 기자가 사진을 찍으려 하자 의자에서 일어나 점잖게 강의 포즈를 취하는 김 교수를 보고 원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1기부터 가르쳐온 김 교수는 “원생들이 흡수력이 뛰어나고 열의가 대단해 가르치는 입장에서도 굉장히 즐겁다”며 “앞으로 이들이 어떻게 성장해 나갈지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서재(西齋)에서 진행 중인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의 삼봉 정도전 수업은 토론식이다. 학생이 발제하고 지정토론자가 질문을 던졌다. 김동조(연세대 3년) 원생의 “불교가 현실정치에 적합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발표자 이원석(연세대 4년) 원생은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정신이 정치 이념으로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답했다. 지정토론자의 질문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손을 들며 질문과 의견을 개진한다. 서재 원생 분포 역시 여자 9명, 남자 6명.

아산서원의 교과목은 역사, 동양철학, 서양철학, 정치, 경제, 문예로 이뤄져 있다. 교수진은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 모종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정진홍 학술원 회원, 김형국 서울대 명예교수, 박형지 연세대 국제대학장, 서 현 한양대 건축학과 교수 등 각 분야 최고 고수들이다.

아산학사 식당에서 저녁식사 하는 원생들 <사진=김남주>
휴게실에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보내줄 털모자를 만들고 있는 원생들. 홍예지 변소정 박주연 김혜지 함수연(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사진=김남주>

PM 6시 : 공동체 생활서 우리를 생각하다

하루 일과를 마친 원생들은 삼삼오오 기숙사인 아산학사 식당으로 모였다. 저녁은 김치, 무채, 콘샐러드, 짜장소스, 칠리새우와 북엇국. 웬만한 회사 식당보다 푸짐하고 맛있다. 저녁을 함께하며 어떤 학생들이 들어왔는지 면면을 살폈다. 옆에 앉은 함수연(북경대 졸업) 원생이 “아침에 태극권 체조 모습을 보고 가셔야 하는데 내일 아침엔 없어서 아쉽다”며 인사를 건넨다. 원생들은 월·수·목 아침 태극권 체조로 심신을 단련한다. TV에선 북한의 권력변화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식탁에 앉은 학생들은 TV를 밥 먹을 때만 잠깐 본다고 했다. 최수진(고려대 4년) 원생은 “과제와 특별활동 등을 마치고 나면 보통 새벽 2시”라며 “대부분이 5시간 이상 안 잔다”고 전했다. 학사 생활이 불편하지 않냐는 질문에 전은총(고려대 4년) 원생은 “여자라 불편한 건 없다. 다 알고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배려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학사 3, 4층은 여학생이, 2, 5층은 남학생이 사용한다.

식사 후 1일 룸메이트인 김기훈(연세대 4년)·강동훈(KAIST 4년) 원생과 얘기를 나눴다. 김기훈 원생은 졸업 한 학기를 남기고 이곳에 들어왔다. 시야를 넓히고 특히 해외 유수 싱크탱크서 인턴십을 할 수 있어 1년을 투자하기로 했단다. 공대생인 강동훈 원생은 인문학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마음이 컸다. 김기훈 원생은 “다양한 분야의 권위 있는 강의를 들으며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는 5개월 과정이 끝나면 미국 북한인권위원회(HRNK)에서 인턴십을 밟을 예정이다. 강동훈 원생은 “플라톤의 국가를 비롯해 여러 고전들을 꼼꼼히 읽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얻는 게 크다”며 “이 과정을 통해 내가 진짜 원하는 길도 찾고 싶다”고 했다.

학사 생활은 전적으로 학생들의 자율에 맡겨진다. 일과 후에는 자유롭게 바깥 생활도 할 수 있다. 11시까지만 입실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여유를 부리는 원생은 없다. 매시간이 빡빡하게 돌아가기 때문. 저녁 식사 후 달콤한 휴식을 취할 사이도 없이 자치회가 소집됐다.

졸업식에서 발표할 실내악을 연습 중인 석창민(바이올린), 최은솜(피아노) 원생 <사진=김남주>
사물놀이와 설장구 공연을 펼치고 있는 원생들

PM 7시30분 : 봉사활동으로 인성을 가꾸다

30명의 원생들이 동재 교실로 모였다. 자치회 주요 안건은 1월10일 열릴 졸업식. 20주 과정 중 16주차에 접어들어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3기생들이 인상적인 졸업식을 치르고 나가 4기생들의 부담이 크다. 특별하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졸업식을 만들기 위해 30명의 학생들이 머리를 맞댔다.

“뮤지컬 형식으로 하면 어떨까요?” “실내악, 합창도 있어야 합니다” “거문고 연주도 들어가면 어떨까요” “반야심경 랩 배틀도 하죠” 다양한 의견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의견만 던지는 게 아니라 말한 본인들이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 사회자 추천을 받기가 무섭게 김기훈·최혜정(KAIST 4년) 원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사회를 본 이형돈(고려대 4년) 동재 대표는 적절히 자르고, 받을 건 받아가면서 1시간 만에 행사 프로그램부터 초대장 제작, 무대정리 일꾼까지 모두 정하는 리더십을 발휘했다. 이후 합창, 실내악, 뮤지컬, 영상 등 각 팀장들이 모여 간단한 회의를 나누고 계획안을 만들었다.

실내악팀은 회의 끝나자마자 연습실로 직진이다. 석창민(서강대 4년) 원생은 얼른 바이올린을 가져와 최은솜(한국외대 4년) 원생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캐논 변주곡’을 연주했다.

아름다운 음악이 가득한 홀 한쪽에선 여자 원생 4명이 옹기종기 앉아 뜨개질이 한창이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보내줄 털모자를 만들고 있는 중. 그런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박주연(이화여대 4년) 원생은 그 중 탁월한 실력을 자랑했다. 남들이 털모자 2개를 짤 때 4개를 만들었다. 원생들은 인문학 수업 외 여러 특별활동을 한다. 금요 프로그램으로 아예 문화기행, 봉사활동, 사물놀이·설장구, 팀스포츠가 정해져 있다. 뜨개질 역시 봉사활동의 일환이다.

에너지 넘치는 이들을 쫒다 보니 벌써 밤 10시. 피곤이 몰려온다. 한 원생은 “매주 짝꿍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자 원생과 남자 원생 간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다. 방금 전 그 뽑기식이 진행됐다”며 기자가 그 순간을 놓친 걸 아쉬워했다. 11시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학생들이 학사로 들어온다. 자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내일 팀별 발표 과제를 의논해야 한다고 했다. 젊음은 아름답다.

김석근 아산서원 부원장이 조회시간에 훈시 중이다. <사진=김남주>

10일 AM 7시30분 : 대한민국 미래를 보다

2층 침대에서 김기훈 원생이 내려오는 미동에 깼다. 7시10분. “몇 시에 잠들었나요?”“새벽 2시 넘어 잤어요.” 오늘은 8시30분 조회를 시작으로, 자오리쥐엔 교수의 실용중국어, 이병택 교수의 수사학, 최정호 교수의 독일현대사, 함재봉 원장의 미셀 푸코, 김석근 교수의 삼봉 정도전 수업이 이어진다. 창문을 여니 차가운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동네 주민들이 언덕을 조깅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침식사 후 아산정책연구원 강당에 20분 앞서 가보니 벌써 와 있는 원생들이 있다. 동재 대표 이형돈 원생도 보인다. 어제 자치회 때 사회 보는 모습이 인상에 남아 옆자리로 갔다. 연장자라 대표가 됐느냐는 물음에 “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하겠다고 나서 대표를 맡게 됐다”고 했다. 이 원생은 “대학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했었는데 그에 대한 반성이 들었다”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아산서원의 특별함에 대해 그는 ‘개인역량 개발과 공동체적 삶의 양식 체득’을 들었다. “이곳 공동체생활은 군대와는 전혀 다르죠.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서로간의 의견수렴 과정이 아주 중요합니다. 포기해야 할 것과 뜻을 관철시켜야 할 일들에 대해 부딪혀가며 배우는 게 많아요.”

김석근 부원장이 조회를 주관하기 위해 들어왔다. 김 부원장은 원생들에게 눈물의 염도를 물었다. “눈물의 염도는 0.9%라고 합니다. 0.9% 소금물이 눈물인 셈이죠. 그 정도만 있으면 물이 썩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0.9%의 역할을 해줬으면 합니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든 그 정도만 있으면 썩지 않을 테니까요. 0.9% 소금, 해 줄 수 있죠?”

오전 9시 아산서원을 나오는 길. 이곳 졸업생들이 사회에 진출해 꿈을 펼칠 10년 뒤 모습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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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리더 키우는 아산서원

<사진=김남주>

아산서원은 아산정책연구원(원장 함재봉)과 아산나눔재단(이사장 정진홍)이 2012년 8월 공동으로 설립한 ‘21세기형 서원’이다. 문학, 사회, 철학에 기반한 전통적인 인문학 교육과 현대적인 영국 옥스퍼드 대학 PPE(Philosophy, Politics, and Economics) 교육과정을 접목한 새로운 개념의 교육기관이다.

대학 3·4학년생과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원생을 뽑는다. 선발되면 5개월간 아산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인문학 교육을 받고, 교육 후에는 워싱턴과 베이징의 유명 싱크탱크와 비영리기관에서 5개월간 인턴십을 수행한다. 교육에 필요한 비용과 숙식비용, 인턴십에 필요한 항공료, 체재비 모두 아산서원에서 지원한다.

10개월 과정을 마치면 ‘Alumni Program’에 참여하게 된다. 정기적인 인문학 강연행사인 ‘아산서원 인문학 로드쇼’, 아산서원서 배운 지식을 지역사회 청소년과 공유하는 ‘아산서원 청소년 인문학 교실’ 등 다양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지금까지 1, 2, 3기 졸업생 90여 명이 배출됐으며 동문회도 발족했다. 1월17일까지 5기생 30명을 모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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