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영국의 제국 경영술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apartheid)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데 대해서 마가렛 대처는 세계의 많은 비판적 여론과 유럽의 비우호적 자세, 무엇보다도 Commonwealth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를 압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대처는 남아프리카를 고립시키는 것은 오히려 개혁-인종차별의 철폐-에 장애가 될 것이며 남아프리카를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키면 시킬수록 그 피해는 소수 백인보다는 다수 흑인에 돌아가서 흑인들은 더욱 폭력적이 되고 남아프리카 정부는 여기에 대해 강경책으로 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남아프리카를 국제사회에 동참시키고 경제적으로 안정시켜 흑인 중산층의 확대와 교육수준의 향상을 가져오면 남아프리카 정부도 개혁에 융통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대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다수의 아프리카, 영연방 국가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대처는 영연방 수반회의에서 고립되었으나 대처는 이에 굽히지 않고 독자의 정책을 밀고 나갔다. 돌이켜보면, 남아프리카가 개혁을 이루게 된 것은 간디와 같은 차원의 넬슨 만델라의 지도력과 더불어 대처의 현실주의적 접근의 공효(功效)도 잊을 수 없다.

대외정책에 있어서 도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국가를 상대하는데 있어서는 전쟁을 불사하는 의지와 능력을 갖지 않았다면 그 상대와 싫든 좋든 접촉을 유지하고 우리 측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현명한 방책이라는 대처의 현실적 전략은 주목할 만하다.

대처는 이러한 현실적 전략이 결국은 소련을 붕괴시키고 남아프리카를 변화시켰다고 평가하였다.

로디지아의 Ian Smith 정부가 일방적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극단적 인종차별 정책을 펴자 로디지아와 Commonwealth 내의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큰 문제가 되었다. 대처는 이를 식민 종주국인 영국이 앞장서서 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Ian Smith 정부에 저항하고 있던 반정부 게릴라 지도자와 로디지아 정부 지도자들을 함께 모아 놓고 협상 끝에 동의할 수 있는 헌법을 초안, 짐바브웨(Zimbabwe)를 출범시켰다. 이 Lancaster House 회의는 영국 외교와 식민지 문제 처리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식민지 문제의 처리에 있어 영국은 정치적 외교적으로 노련하였던 것은 물론 식민지 경영에 있어서도 대단히 노련한 방법을 썼다.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제국 황제를 겸했을 때에도 그 방대한 인도를 단지 4000명의 civil service로서 통치하였는데 철도는 광궤(廣軌)와 협궤(挾軌)를 함께 설치하여 지역 간의 소통을 차단하는 등의 교활한 방법도 썼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나선 것도 서구의 식민정책에 이런 뼈아픈 구석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4월28일은 일본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연합국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일본은 주권회복일이라고 부른다.

한국은 ‘외교의 귀신’ 이승만 박사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일강화조약 당사국이 되지 못하였는데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자 백범이 한탄한 이유다.

일본도 한때 나라를 잃었던 국민으로서 아직도 한국과 중국의 망국의 한에 소금을 뿌리는 것을 보면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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