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실린 한석호 한국노동재단 사무총장의 칼럼이 실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문장이었다. 그의 주장에 담긴 뜻은 결코 새롭지 않았지만, 그가 그 주장을 펼친 ‘장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거 짱돌과 화염병을 들었던 노동운동가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보수 독자들에게 “이제는 보수가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에 나서야 한다”고 호소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한석호 총장의 글에는 용기와 진정성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진보 진영 내부의 시선과 비판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영 밖’과 대화하려 했다. 그 선택이 쉽지 않았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 또한 20년 넘게 한겨레 기자로 일했고, 한국기자협회장 시절에는 진영을 넘어선 통합과 연대의 필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언론 역시 진보와 보수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엔 비현실적인 이상론처럼 보였던 그 생각이, 지금은 점점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노동문제는 더 이상 특정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다. 특히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는 우리 사회 양극화의 핵심 축이며, 청년세대의 미래와 직결된 구조적 과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는 단순한 고용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신뢰와 공정성의 문제로 번지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노동운동가만의 목소리로는 부족하다. 기업과 정부, 보수 진영도 주체로 나서야 한다.
한석호 총장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그는 조선일보라는 보수 매체를 공론장으로 활용했고, 그 지면에서 노동의 언어를 전했다. 이는 설득이 아니라 대화의 시작이다. 보수 독자들에게 ‘다른 언어’를 소개하고, 그들 역시 노동시장 개혁의 책임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 방식은 낯설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필요한 시도다.
지금 한국사회는 극단의 분열과 갈등 속에 놓여 있다. 진영은 말할 것도 없고, 세대, 지역, 계층, 이념, 감정이 깊이 갈라져 있다. 이 갈등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과 먼저 말문을 트고, 이질적인 가치와도 공존의 가능성을 찾는 노력 없이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러한 ‘경계인의 언어’가 지금 한국사회에 절실하다. 자신이 속한 진영 안에서만 목소리를 키우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변화는 경계에서 시작된다. 한 총장은 그동안 한겨레신문에 여러 차례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내가 아는 한 안광복 중동고 교사와 우석훈 박사가 두 신문에 동시에 정기적으로 기고를 했다.
안광복 교사는 학교 현장에서 철학을 통해 학생들에게 ‘편 가르기’를 넘는 사고를 강조해왔고, 우석훈 박사는 “진보를 위한 진보는 공허하다”고 말하며 구조적 변화를 위한 실질적 논의의 장을 고민해 왔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 진영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기자는 경계를 넘는 사람이다. 기자협회장 시절, 나는 진보와 보수의 언론인들이 함께 토론하는 자리를 여러 차례 만들었다. 대화와 연대는 비굴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생명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가 전태일재단과 함께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다룬 기획을 연재하고, 한석호 총장의 칼럼을 게재한 일은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본다. 물론 일회성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지속적인 대화와 상호 이해를 위한 시도가 이어져야 한다.
우리는 지금 출산율 위기, 양극화, 세대 갈등, 정치적 분열이라는 중층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위기를 넘어서려면 각자의 진영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이들이 만나 대화를 시도하고, 공동의 문제를 향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 그 시작은 언제나 불편하고 어색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피해서는 어떤 해법도 나올 수 없다.
‘경계인’은 때로 외롭다.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건너는 다리가, 결국 사회 전체를 움직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을 긋는 언어가 아니라, 다리를 놓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