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엄상익 칼럼] “굽히고 수모당해 보셨어요?”

아들은 바닥 생활의 투사가 된 것 같았다. 아들이 덧붙였다. “한번은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미국 경찰이 줄을 세우는데 조금만 비뚤어져도 쇠몽둥이로 막 까더라구. 미국이 민주 법치국가라는 거 당해 보니까 말도 안되는 것 같아. 그렇게 힘이 들 때 미국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멕시칸들을 봤어. 한국사람 받는 돈보다 몇분의 일도 되지 않는데 열심히들 일해. 그걸 보면 위안이 됐어.”(본문에서) 사진은 벽화 속 고대 이집트 노예들

일기를 들추다 2006년 8월 19일 토요일 오후 동네 공동목욕탕에서 아들과 나누던 대화를 적어 놓은 걸 보았다. 아들은 그 무렵 LA에서 대학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술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하는 웨이터 일은 팁으로 사는 거야. 굽히고 수모를 당하고 그 댓가로 돈을 버는 일이지. 어떤 사람들은 돈 자랑을 하면서 웨이터들을 막 무시해. 리빠똥들이지. 그런 리빠똥들보다 더 싫은 건 배운 놈들이야. 리빠똥들은 욕을 해도 바닥에서 굴러본 놈들이기 때문에 나중에 팁을 주거나 마음을 풀어줘. 그렇지만 배운 놈들은 자기 잘난 체만 하고 가. 특히 의사나 변호사놈들은 술집에 와서 꼭 과시하고 싶어 하거든.”

내가 하는 변호사란 직업이 어떤 것인지 전문직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지 아들의 눈과 입을 통해서 깨닫는다. 아들이 말을 계속했다. “따귀를 맞아 본 적도 있어. 서비스가 시원치 않다고 큰소리 치면서 과시하느라고 그러는 거지. 꾹 참았어. 사장이 그냥 얻어맞으라고 하더라구. ‘너도 엔간히 못난 놈이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한번 더 굽어주면서 그 좋아하는 꼴을 보면 한심한 거야.”

아들의 내면이 많이 성숙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들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참은 건 아니야. 한번은 들고 있던 쟁반이랑 접시를 다 던지구 술집을 다 때려 부숴버린 적도 있어. 울어도 보고 술 먹고 기절해 보기도 했어. 그러면서 참고 살아가는 걸 배웠지. 손님이 술을 먹다가 취해서 집으로 가지 않고 자면 아침까지 나도 잠을 못 자고 밤을 꼬박 새워야 해. 외상으로 술을 먹고 도망 다니는 놈들이 있어. 친구나 후배들을 시켜서 잡으러 다녀. 그렇지 않으면 내 돈으로 물어내야 하니까 말이야. 돈 받는 방법은 자존심을 확 긁어버리는 거야. 그럴 때 잘 살펴보면 순간적으로 눈빛이 흔들리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도 누가 그러면 ‘에이 더럽다’ 하면서 절대 돈을 주지 마.”

아들은 바닥 생활의 투사가 된 것 같았다. 아들이 덧붙였다. “한번은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미국 경찰이 줄을 세우는데 조금만 비뚤어져도 쇠몽둥이로 막 까더라구. 미국이 민주 법치국가라는 거 당해 보니까 말도 안되는 것 같아. 그렇게 힘이 들 때 미국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멕시칸들을 봤어. 한국사람 받는 돈보다 몇분의 일도 되지 않는데 열심히들 일해. 그걸 보면 위안이 됐어.”

아들은 몸으로 세상의 밑바닥을 체험한 것 같았다. 아들은 이런 말도 했다. “한국 아이들 잘사는 애들은 말도 못해. 몇억 짜리 차를 타고 나이트클럽에 여자 꼬시러 가는 거야. 클럽 앞에 수십억이 주차해 있다니까. 아주 건방을 떨기도 하고 말이야. 그 아이들과 웨이터를 하면서 뺨을 맞는 내가 비교되더라니까. 나는 이제야 아빠가 가난하게 크면서 어떤 감정의 변화를 느꼈는지 알 것 같아. 우리 엄씨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잘 안됐다는 걸 알고 있지.”

아들이 내게 현실을 가르쳐 주는 선생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아들을 유학 보낸 중학교 때를 떠올렸다. 어느 날 아들이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에서 험한 아이들한테 많이 맞은 것 같았다. 아들은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다. 중학생인 아들이 내게 ‘사는 게 피곤하다’고 말했다. 내가 중학교 때도 요즈음 같으면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의 칼에 맞고 무기정학을 당한 적이 있다. 가해자는 재벌집 아들이었다. 피해자인 내가 처벌을 받는다는 게 불공정하다고 느꼈다. 어머니에게 미국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가게만 해주면 거기서 접시를 닦으면서 혼자 살아보겠다고 했다. 수십년 흐른 후 아들이 내가 하던 똑같은 소리를 했다. 나는 아들을 보냈다. 아들을 혼자 넓은 바다로 내보내는 것 같았다. 상어에 뜯어 먹혀 죽더라도 그건 아들의 운명이라는 생각이었다. 살아남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나는 아들의 학비에도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무리를 해서 얼마나 보내주었는지 지금도 모른다. 아들은 그렇게 커 주었다.

그날 한국으로 온 아들과 목욕을 끝내고 내가 이따금씩 선물할 돌반지 같은 걸 사던 금은방으로 갔다. 거기서 아들이 목에 걸고 다닐 십자가를 주문했다. 성경 속 요셉은 다른 나라에 종으로 팔아넘겨지고 감옥에 갔어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나라의 총리가 되게 했다. 인간의 운명은 결국 그분께 달린 일이 아닐까. 나는 그걸 믿는다.

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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