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신현확에 대한 두 평가…탱크 앞에 섰던 총리,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다

‘시대의 시련: 신현확의 끝나지 않은 유산’…왼쪽부터 ‘강제 징집과 청년 시절’, ‘선택과 도쿄에서의 시간’, ‘성찰과 노년의 신현확’ <AI생성 이미지>

재판은 계속됐다
“신현확이 군수성 군수관으로 승진했다는 일본 정부 문서를 제출하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측 변호인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신청인 측은 어떤 증거가 있습니까?” 판사가 나를 바라봤다. “시간을 주십시오. 일본 정부 기록보존소를 뒤지고 있습니다.” “재판부가 요구하는 것은 공문서입니다.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문서여야 합니다.”

법정을 나서며 신철식이 말했다. “아버지를 아는 일본 사람들을 통해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 “얼마나 걸릴까?” “모르지. 하지만 반드시 찾고 말 거야.” 재판은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자료가 쌓여 있었다. 녹음테이프, 신문 스크랩, 그리고 신철식이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적어놓은 메모들. 나는 인간 신현확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확신이 서야 재판부에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다. 이 재판은 단순히 1943년 어느 하루의 문제가 아니었다. 재판부는 한 인간의 전체 생애를 보고 판단해야 했다. 스물네 살 청년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평생을 어떻게 관통했는지를 함께 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의 한 조각만 보는 셈이었다. 두꺼운 소설의 한 페이지만 읽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과 비슷했다. 나는 아들이 기록한 그의 마지막 순간을 들여다봤다.

병실에서 되살아난 12·12의 기억
2007년 4월. 병원 침대 위에서 87세의 노인 신현확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의식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가 밀물처럼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의 입에서 이따금 말이 흘러나왔다. “사단장 바꿔라! 거기서 부대 이동을 멈춰라!” 그는 12·12, 평생 잊지 못한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저놈들이 나를 제거하려고….”

그는 두려운 듯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그의 의식은 점점 더 먼 과거로 향했다. 1979년도 아닌, 1960년도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그는 이십 대 청년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배가 아플 예정”
1941년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스물한 살의 신현확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자 조선인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느냐, 거부해야 하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훈련을 거부하면 퇴학이야. 아니, 감옥에 갈 수도 있어.”“하지만 일본군 총을 들 수는 없어.” 동기들이 술렁거렸다. 어떤 이는 순응했고, 어떤 이는 저항을 택했다.

신현확은 사유서를 썼다. ‘배가 아플 예정.’ 일주일 뒤 제출해야 하는 군사훈련 사유서에 그렇게 적었다. 미리 아플 것을 예고하는 기묘한 문장이었다. 조롱인지, 저항인지 모를 표현이었다. 경성제대 교수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건 사실상 훈련 거부다. 징계해야 한다.” “하지만 병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나.” “일주일 후에 아플 예정이라니, 말이 되나?”

그를 아끼던 한 교수가 적극 변호했고, 가까스로 그는 징계를 피할 수 있었다.

일본 제국의 관료가 되는 길
1943년 봄, 도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다. 조선인으로서는 대단한 성취였다. 출세가 보장된 길이었다. 아버지가 기뻐했다. “과거에 급제했구나!” 몰락한 양반가 후손이었던 아버지에게 고등문관시험은 조선시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의 합격은 평생의 염원이었다.

신현확은 학문을 계속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그는 배치고사를 치렀고 최상위 성적을 받았다. 도쿄 상공성 수습 사무관으로 배치됐다. ‘수습’이었다. 일정 기간 실무를 익힌 뒤 정식 관료로 임명되는 과정이었다. 아직 일본 제국의 정식 관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1944년 4월, 도쿄.
그는 아내와 함께 도쿄로 갔다. 도시는 매일 미군 B-29 폭격기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비행기 소리만 들리면 방공호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신현확은 방공호로 가지 않았다. 사무실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방공호에 있든 사무실에 있든 죽을 확률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루 속 콩나물처럼 떨며 숨어 있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배정받았던 방공호가 폭격을 받아 대피한 사람들이 몰살당한 일도 있었다.

그는 공습이 끝나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불타는 도시를 내려다보곤 했다.

불타는 도쿄와 흔들리는 제국
1945년 3월 10일 밤. B-29 수백 대가 도쿄 상공을 뒤덮으며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거리마다 시신이 쌓였다. 일본의 패전은 이미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 무렵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가 수습 사무관들을 모아놓고 강연했다. “대일본제국은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강연이 끝난 뒤 한 수습 사무관이 손을 들었다. “일본 제국은 정말 승리할 수 있습니까?” 다음 날 그는 사라졌다. 병사로 차출돼 남방 전선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신현확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까지 감지는 않았다. 그는 또 다른 장면도 목격했다. 패전을 앞두고 젊은 일본 관료들이 모여 공부하는 소모임이었다. ‘아시아의 장래 전망’ ‘패전 후 일본의 방향’ 그들은 이미 패전 이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현해탄을 건너 돌아오다
어느 날 신현확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궐기문을 읽었다. ‘모든 한인은 관직에서 나오라. 이제 독립을 위해 싸우자.’ 그는 오래도록 그 문구를 바라봤다. 밤에 아내가 물었다. “당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혹시 돌아가려고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 눈빛에는 두려움과 결의가 함께 서려 있었다. “돌아가면 어떻게 돼요?” “모른다. 수배될 수도 있고.” “그래도 가려고요?” “…가야 할 것 같다.”

1945년 여름.
군수성에서 정식 발령이 났다. ‘군수관 임명.’ 이제 수습이 아니었다. 일본 제국의 정식 관료가 되는 순간이었다. 부임할 것인가, 말 것인가. 신현확은 현해탄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고향 왜관의 외딴집에 몸을 숨겼다. 일본 경찰이 몇 차례 찾아와 행방을 물었지만 친척들은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리고 해방이 왔다.

그의 의식은 점점 더 먼 과거를 헤맸다. 1945년 왜관에서, 196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1979년 국방부 회의실에서, 1980년 중앙청 계단에서. 그의 생애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침내 썰물처럼 빠져나간 그의 영혼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갔다.

2007년 4월 30일. 무르익은 봄날. 오전 10시가 가까워오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와 고락을 함께했던 사람들이었다.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조사를 했다. “신현확 총리는 오늘날 한국 경제의 산파였습니다.” 가장 치열한 정책적 반대자였던 사람이 남긴 평가였다.

신현확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조용히 잠들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이름 ‘신현확’
1년 뒤인 2008년 어느 날. 텔레비전 화면에 신현확 전 총리의 생전 모습이 흘러나왔다. 뒷짐을 지고 걷는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표했다. “친일파가 정리되어야 우리 민족 정기가 바로 섭니다.” 그 안에 신현확의 이름도 있었다.

변호사인 나는 자료를 덮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법정에서 신현확이 되어 싸우겠다고. 1945년 여름 왜관에 숨어 있던 그 청년을 위해. 1979년 겨울 탱크 앞에 섰던 그 총리를 위해. 1980년 봄 홀로 버티던 그 사람을 위해. 역사의 아이러니를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었다.

신철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에서 뭐 찾았어?” “아직이야. 하지만 반드시 찾을 거야.” “좋아. 나도 계속 준비할게.” 재판은 계속될 것이었다.

“우리가 왜 이 일을 하는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가 가방에서 두꺼운 파일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친일파 명단 4,700명의 행적 자료입니다. 우리가 10년 동안 모은 겁니다.” 그가 파일을 펼치자 빼곡한 이름들이 보였다. “이 사람들이 뭘 했는지 아십니까? 조선 청년들을 징용 보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습니다.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데 해방 후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잘 됐습니다. 그들의 자손들은 지금도 이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면서 누리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가 끼어들었다. “신현확 씨와는 다른 케이스 아닙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연구원이 단호하게 맞받아쳤다. “예외를 두는 순간 모든 기준이 무너집니다. 기준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일제 고급 관료였으면 친일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10월 26일 내란 살인범 김재규와 싸운 부총리 신현확은 무엇입니까? 12월12일 탱크 앞에서 나라를 지킨 신현확은 어떤 존재입니까?”

“1979년? 1980년? 그게 1943년의 일본 관료를 지웁니까?“ 답답했다. “그게 1943년을 설명하지 않습니까?”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닙니다. 나중에 잘했다고 해서 과거가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그럼 과거가 나중의 공들을 지워버려도 되는 겁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원칙이 필요합니다.“ 연구원이 다시 강조했다. “원칙이 사람을 죽여도 됩니까?” “개인의 사정을 다 봐주면 친일파 청산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구조’를 보는 겁니다.” “구조요?” “네. 일제강점기라는 구조. 그 구조에 참여한 사람은 친일파입니다. 개인의 의도나 나중 행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한 장면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나는 신념에 찬 그의 눈을 바라봤다. 뭔가 섬뜩했다. “그럼 당시 엘리트들은 다 친일파입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일제의 교육 제도를 이용한 거니까요.” “그런 논리라면 그 시대를 산 조선인은 모두 친일파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저희들은 관직에 나간 사람들을 적극 협력자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구조’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지우고 있었다. 연구원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현확의 행위는 친일을 넘어 국제범죄에 협력하는 것이었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신현확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으로 수천만의 민중을 학살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군수물자를 관리하는 군수관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봤다. “신현확은 우리가 친일파로 인식하고 있는 이완용보다 국제사회에 더욱 극심한 피해를 끼친 것입니다.” 순간 숨이 막혔다. 그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는 겁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민족문제연구소 측 변호사가 일어났다. “신현확 씨가 군수관으로 부임했다는 일본 정부 문서를 증거로 제출할 예정입니다. 지금 연구소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되어 찾고 있습니다.” 확인 사살까지 하겠다는 예고였다.

법정을 나서며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두 개의 정의가 충돌했다. ‘구조’와 ‘개인’. ‘원칙’과 ‘진실’. 나는 회의가 들었다. 그들에게 신현확이라는 한 개인의 수고와 땀은 어떤 의미일까. 그날 밤, 사무실에 혼자 남았다. 책상 위에는 신현확의 자료들이 쌓여 있었다. 녹음 테이프. 신문 스크랩. 증언서. 하지만 판사가 원하는 건 하나였다. ‘공문서’ 없었다.

재판은 일주일 후였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우리는 질 것이다. 증거 없이는 이길 수 없다. 하지만…

1979년 그날 밤, 1980년 그 봄, 그것만으로는 부족한가? 나는 자료를 다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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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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