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람을 위한 생각이라면 현실과 생각 사이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하지 않을까”

모파상의 여인은 평생 집이 없었지만 사랑할 곳은 있었다. 다만 그 사랑에 이르는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오현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는다.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이승과 저승만큼 먼 거리라면 더더욱 돌다리가 필요하다. 사랑에도 그렇고, 사람을 위한 생각에도 그렇고, 우리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에도 그렇다. 마음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생각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한다.-본문에서 사진은 기나 할릭 레바논 기자가 2019년 백담사 템플스테이 참여 후 그린 백담사 풍경

며칠 전, 폐버스를 청년주택으로 활용하자는 어느 정치인의 제안을 보았다. 운행을 마친 버스를 개조해 청년들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자는 아이디어였다. 흥미로운 생각이었다. 그런데 곧 질문이 쏟아졌다. 버스를 어디에 놓을 것인가. 상하수도는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전기는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 소방과 안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질문이 많아지자 그는 결국 “단순한 아이디어였을 뿐”이라며 제안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읽는데 이상하게도 오래 전에 읽었던 모파상의 <의자 고치는 여인>이 떠올랐다. 참 엉뚱한 연상이었다. 버스에서 모파상이라니. 모파상의 단편은 사냥에 모인 귀족들에게 한 의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의사는 임종을 앞둔 한 여인을 만났던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는 평생 의자를 고치며 살았다. 한 번도 기둥이 땅에 박힌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그녀의 집이었다. 그런 여인이 평생 한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는 그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신분도 달랐고, 삶의 자리도 달랐다. 그녀는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현실의 관계로 만들 수 없었다. 결국 그녀가 가지고 간 것은 평생 간직한 사랑뿐이었다.

그런데 모파상은 그 사랑을 비웃지 않는다. 오히려 의사는 그것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은 남작부인이 마지막에 한마디를 한다. “역시 사랑을 할 줄 아는 이는 여자뿐이군요.” 그 문장이 오래 남았다.

그러다 이번에는 조오현의 시가 떠올랐다. 사랑도 사랑 나름이지 정녕 사랑을 한다면/ 연연한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나는 이 시에서 ‘돌다리’라는 말에 오래 머물렀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녕 사랑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여울에 돌다리 하나쯤은 놓아야 한다. 마음과 현실 사이에 놓는 다리다. 가난과 풍요 사이에 놓는 다리이고, 신분과 신분 사이에 놓는 다리이며, 살아 있는 사람과 떠난 사람 사이에 놓는 다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모파상의 여인에게는 그 돌다리가 없었다. 그녀는 사랑했지만 건널 수 없었다. 평생 의자를 고쳤지만 자신의 사랑으로 건너갈 다리는 만들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의 사랑이 더 슬픈지도 모른다. 그녀가 고친 것은 의자였다. 사람들이 앉을 자리를 고쳐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에게 필요한 자리는 없었다.

다시 폐버스로 돌아온다. 폐버스를 청년의 집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도 처음에는 그저 하나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현실로 들어오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버스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 그곳에 물은 어떻게 들어가고 오수는 어디로 나갈 것인가. 겨울에는 어떻게 따뜻하게 할 것인가. 사람이 살기 위한 안전과 사생활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그때부터 아이디어와 현실 사이에 여울이 생긴다.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과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이디어는 저편을 가리키지만, 사람을 저편으로 건너가게 하려면 다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 정치인이 “단순한 아이디어였을 뿐”이라고 물러난 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의 많은 변화는 처음에는 어쩌면 단순한 아이디어였을 테니까.

문제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다음이다. 그 아이디어와 현실 사이에 돌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는가. 모파상의 여인은 사랑을 했다. 그러나 돌다리를 놓을 수 없었다.

조오현은 말한다. 정녕 사랑한다면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한다고. 그리고 폐버스의 이야기는 그것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묻는다. 정녕 사람을 위한 생각이라면, 현실과 그 생각 사이에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하지 않을까.

돌다리는 반드시 거창할 필요가 없다. 버려진 버스 하나를 다시 사람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것, 낡은 의자 하나를 버리지 않고 다시 앉을 자리를 만드는 것, 누군가의 삶을 쓸모없다고 판단하지 않고 한 번 더 바라보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폐버스와 모파상의 의자 고치는 여인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버스는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물건이었다. 의자는 사람이 잠시 몸을 맡기는 물건이었다. 마차는 이동하는 사람의 집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묻게 된다. 사람이 사는 곳을 집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머물 수 있는 곳을 집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모파상의 여인은 평생 집이 없었지만 사랑할 곳은 있었다. 다만 그 사랑에 이르는 길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오현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읽는다. “그 물론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은 되어야.”

이승과 저승만큼 먼 거리라면 더더욱 돌다리가 필요하다. 사랑에도 그렇고, 사람을 위한 생각에도 그렇고, 우리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에도 그렇다.

마음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생각에서 끝내지 않으려면, 돌다리 하나는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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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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