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지역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자조 단체는 어떤가? 안산시 선부동과 광주광역시 월곡동, 경주시 성건동, 아산시 신창면 등 고려인 집거지에서 활동하는 자조 모임은 적지 않다. 다만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역 고려인센터나 가족센터 활동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어 여기서는 제외하고자 한다.
현재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고려인 자조 단체는 ① 김해 ‘구소련친구들’, ② 인천 함박마을 고려인주민회, ③ 평택 고려인지원협의회, ④ 전주 전북고려인협회 정도다.
김해 ‘구소련친구들’은 2015년 12월 한국인 황원선 씨가 고려인 동포들을 위해 창립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이미 고려인들이 주도하는 자조 단체로 자리 잡았다. 2021년 4월 창립된 인천 함박마을 고려인주민회(회장 리빅토르) 역시 한국인 시민단체의 지원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자체 행사를 주최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2023년 12월 창립된 평택 고려인지원협의회도 안중로타리클럽, 사회적협동조합 짜임, 서평택푸드뱅크, 평택안성흥사단, 평택외국인복지센터 등이 연합해 만든 지역 연대협의체다. 그러나 고려인 황갈리나 씨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인들의 주체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북고려인협회 모임에 거는 기대
이러한 흐름에서 2026년 6월 창립한 전북고려인협회가 특별히 주목된다. 전북고려인협회(회장 배타마라)는 전주글로벌다문화센터의 지원 속에서 2026년 6월 5일 창립됐다. 전북고려인협회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보다 고려인 집거지가 아닌 지역에서 창립됐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출범과 함께 외부 강사를 초청해 ‘고려인 역사 공부 모임’을 시작했다는 점도 의미가 크다.
전북고려인협회의 ‘고려인 역사 공부 모임’은 러시아어와 한국어 이중언어로 진행된다. 전주글로벌다문화센터와 아시아발전재단(ADF)이 공동 후원하고 있다. 지난 7월 19일 열린 제1회 강사는 모스크바국립대 문학박사인 정막래 호서대 초빙교수였고, 오는 9월 10일 열리는 제2회 강사는 전북대 국제협력처 초빙교수를 역임한 고려인글로벌네트워크(KGN) 채예진 이사장이다.
ADF는 채예진 이사장에게 두 가지 주제를 제시했다. 첫째 주제는 ‘1937년 9월 9일 고려인 강제이주 이야기’다.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소개해 달라고 했다. 이번 모임에는 법무부와 재외동포청 관계자, 전북대 교수 등도 참여할 예정인데, 전북고려인협회 배타마라 회장이 정막래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 와닿았다. : “우리는 뿌리가 하나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 그리하여 고려인 역사 교육은 재외동포인 고려인에게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포세계신문> 2026.7.27. “[정막래 인터뷰] 전북고려인협회 초대 회장 배타마라”)
둘째 주제는 ‘고려인의 한국(전북) 정착과 베이커리 직업훈련’이다. 아시아발전재단은 2027년 전주에서 고려인을 위한 ‘페치카 베이커리 직업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채예진 이사장에게 이 주제를 요청한 것은 그가 직접 페치카 베이커리 로고가 새겨진 조리복을 입고 직업훈련에 참여하고 그 성과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역사 교육과 직업훈련. 얼핏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역사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직업훈련을 통해 지역사회에 경제적으로 정착하는 것. 이 두 가지가 함께 갈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고려인 정착이 가능하다.
ADF 4기 고려인 직업훈련, 성과 나오고 있어
지난 7월 경기도 성남시 동서울대에서 4주간 단기 집중교육으로 진행한 ADF의 제4기 고려인 베이커리 직업훈련은 이전 1~3기와 달랐다. 무엇보다 이미 러시아빵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교육생이 3명이나 참여했다. 이들은 현재 러시아빵뿐 아니라 직업훈련에서 배운 한국빵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의 고이리나 씨도 그중 한 명이다. ADF가 기증한 효율성이 뛰어난 우녹스 오븐을 활용하면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연합뉴스> 2026.8.19. “[동포의 창] 고려인의 꿈 굽는 ‘희망의 화덕’…’페치카베이커리’ 첫발”) 고이리나 씨의 가게는 원래부터 한국인 고객이 많았다. 그런데 직업훈련 이후 판매가 날마다 늘고 있다. 오는 9월 하순에는 ‘페치카 베이커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업할 예정이다.
또 하나 반가운 소식이 있다. 바로 엊그제인 8월 30일, 제4기 교육생 가운데 첫 취업자가 나왔다. 주인공은 경북 영천의 제조업체에서 일하다가 베이커리 직업훈련을 받은 정안톤 씨다. 정안톤 씨는 한국어 실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베이커리 매장 경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시아발전재단의 O2O(오븐에서 기회까지) 프로그램 덕분에 경주의 ‘농부의 주말 빵집’ 취업에 성공했다. ADF 김준일 이사장은 고려인 교육생들이 최대 1년간 월 60만 원의 임금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연수생’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한 명의 취업 성공에 있지 않다. 교육에서 끝나지 않고 취업으로, 취업에서 지역 정착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졌다는 데 의미가 있다.
ADF는 제5기 고려인 직업훈련을 지방에서 개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시대에 고려인 정착을 단순히 ‘외국인 주민 유치’의 관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지역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기회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교육과 문화, 의료 등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진 지역의 거점도시를 고려인 동포들도 희망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전주는 중요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전주가 고려인의 새로운 ‘고향’이 될 수 있을 것인지?

ADF는 우선 전주에서 전북고려인협회·전주글로벌다문화센터와 함께 수도권·충청·광주 지역 고려인을 위한 베이커리 직업훈련을 추진할 예정이다. (영남 지역에서도 베이커리 직업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전북고려인협회가 역사 공부 모임을 지속하면서, 베이커리 직업훈련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고려인이 전북에서 일하고, 창업하고, 자녀를 키우며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데도 적극적으로 나서주기를 기대한다. 또한, 지역사회도, 과거 한국전쟁 시기 황해도 피란민을 받아들여 김제에 황해도마을이 조성된 것처럼, 귀환하는 고려인 동포를 적극적으로 포용해 주기를 바란다.
전북에 정착하려는 고려인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마련되고, 전북 지역사회에는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대응하는 새로운 상생의 모델이 제시될 수 있기를 바란다.



